본문 바로가기
코리아둘레길

자유를 찾아 떠나는 남파랑길

by 걷고 2023. 10. 8.

아내 여행 기간 동안 남파랑길을 홀로 걷는다. 약 일주일간의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인가에 대해 여러 생각들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홀로 남겨진 홀가분함을 주체 못 하는 것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담마 코리아’에 들어가서 조용히 명상을 하며 지낼까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조용히 침묵 속에서 명상하기에는 마음이 많이 들떠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일탈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산티아고를 함께 걸었던 길동무가 2박 3일간 텐트를 짊어지고 서해랑길을 함께 걷자고 했다. 노숙하며 걷는 것은 늘 하고 싶은 일이다. 걸으며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 바로 숙소다. 걷기 종료 지점 부근에서 조용히 쉬면서 자연을 감상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싶다. 그리고 그다음 날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오고 있었다. 걷기 마친 후 숙소를 찾아 복잡한 시내로 들어갔다가 다시 걷기 위해 그 위치로 돌아오는 번거로움이 싫어서이다. 근데 갑자기 이번 길은 홀로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에게 양해를 구했다. 흔쾌히 이해해 주는 그 친구 마음이 고맙다. 또 다른 친구는 원주에 있는 자신의 농막에서 며칠간 머물며 치악산 둘레길도 걷고 조용히 쉬어 가라고 했다. 고마운 마음이다. 며칠 전 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갑작스러운 집안일로 농막은 다음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채용 면접 위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고마운 친구가 13일 면접 일정이 있다고 연락해 왔다. '수입'과 '걷기'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고맙지만 이번만은 다른 위원을 섭외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나의 계획을 알고 있는 가까운 친구여서 그런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고맙다. 

 

 자연스럽게 모든 약속에서 해방되었다. 어쩌면 이번 기간은 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만들어준 기회일 수도 있다. 10월 11일에서 18일까지 자유시간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해도 된다. 집에서 혼자 조용히 침잠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홀로 여유를 즐기며 천천히 걷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론적으로 남파랑길을 걷기로 했다. 그간 코리아 둘레길 걷는 계획을 포기하고 있었다. 아내가 장기간 집 비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장기간 걷는 것 대신 짧게 다녀온다면 허락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코리아 둘레길 구간 중 남파랑길을 일주일간 걷고, 그 이후부터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2박 3일 걷는다면 아내도 굳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완보하기까지 기간이 많이 걸릴 수는 있겠지만 기간은 문제 되지 않는다. 언제까지 반드시 완보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다. 상황에 맞춰 꾸준히 걸으면 된다.      

 

 친동생 같은 대학교 후배가 부산에 살고 있다. 전화를 해서 11일에 만나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다. 역까지 마중 나온다는 것을 물리치고 후배 집 근처 편한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먼 곳까지 굳이 마중 나오는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다. 시간 많은 내가 움직이면 된다. 늘 내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는 고마운 후배이자 친구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며 취향을 묻는다. 원래 음식 취향이 딱히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편하게 결정하라고 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부산에서 서울까지 직접 문상 온 고마운 친구다. 학창 시절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었고, 어머니로부터 늘 후한 대접을 받았다. 술을 마실 때도, 식사를 할 때도, 또는 무엇을 하든 늘 그 친구가 계산을 했다. 후배지만 하는 행동은 형 같은 사람이다. 나는 선배지만 늘 받기만 했던 후배 같은 선배다. 미안하고 고마운 친구다. 늘 보고 싶은 친구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구이다. 이번에 내려간 김에 얼굴도 보고 식사도 함께 하며 지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이번에는 내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지금은 부산에 살고 있는 만나고 싶은 친구가 한 명 더 있다.  업무상 만난 친구지만 업무를 떠나 자주 찾아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친구다. 언제 찾아가도 늘 반갑게 맞이해 준 고마운 친구다. 사업을 접은 후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업무 공간을 무료로 6개월 이상 사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 친구이다. 또 개인 상담을 진행할 때도 무료로 상담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친구다. 약 4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부산으로 내려가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먼저 연락하기보다는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연락을 자제하고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며칠 전 카톡으로 안부를 전해왔다. 그 연락이 너무 반가웠다. 뭔가 힘든 과정을 견뎌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다. 마침 이번에 부산에 내려갈 기회가 있으니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화요일인 10월 10일에 통화하며 약속을 잡기로 했다. 식사든 차든 대접하며 그간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두 사람에게 갖고 있던 마음의 빚을 이번 기회에 조금이라도 갚고 싶다. 물론 식사 한 끼, 차 한 잔으로 갚을 수 있는 빚은 아니지만 최소한 고맙다는 표현은 하고 싶다. 사람들과의 인연이 소중하다는 것을 점점 더 깊게 알아가고 있다. 인연이 이어질 사람도 있고 끊어질 사람도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어질 인연이나 끊어질 인연을 서둘러 끊어 내거나 억지로 이어갈 필요는 없다. 결정과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섭리가 알아서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여기’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 즉 만남과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또한 시간이 흘러가면 언젠가는 의미가 없어지기도 한다.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만나지는 못했지만, 늘 마음속에 살아있는 고맙고 반가운 친구들이다. 반가운 옛 인연을 만난다는 설렘도 좋다. 11일은 남파랑길 출발지점 인 오륙도 해맞이 공원 부근 숙소에서 하루 푹 쉰 후 12일 아침부터 남파랑길을 드디어 시작한다. 길을 걷는다는 설렘도 무척 기분 좋은 설렘이다.  

    

 어제부터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경기 둘레길 완보 후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배낭을 다시 꺼내 내용물을 비워내고 필요한 것을 채우고 있다. 경기 둘레길은 걷기 동호회회원들과 함께 대절 버스로 이동해서 걸었다. 따라서 짐도 간편하고 준비물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남파랑길은 홀로 걷는다. 숙소도 첫날 숙소 외에는 예약하지 않았고, 매일 걷기 마친 후에 눈에 띄는 곳에 들어가 머물 생각이다. 하룻밤 머무는 곳이니 굳이 좋은 숙소일 필요는 없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비, 바람을 피해 잠만 잘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다.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기에 한 끼 정도의 식사 대용물을 들고 다닐 생각이다. 일주일 동안 걷기에 필요한 옷과 물품도 챙기고 있다. 매일매일 간단한 옷은 빨  수 있어서 두 벌 정도의 여유 옷만 준비하면 된다. 복용약도 준비하고, 비옷도 준비하는 등 챙길 물건이 많다. 이번에 걷고 나면 필요한 물품과 그렇지 않은 물품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짐을 조금씩 줄여나갈 생각이다. 좀 더 단출하게 챙겨서 걷고 싶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에도 준비해 간 물품의 1/3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불안은 마음의 짐과 물질적인 짐, 이 두 가지를 만들어 낸다.      

 

 길을 걷는 것은, 그것도 홀로 걷는다는 것은 불안 속에 또는 불확실함 속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다. 불안은 우리를 구속하고,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수많은 짐을 만들고, 그 짐을 짊어지게 만들며 힘들게 한다. 불안과 불확실함 속에 자신을 던지며 이들로부터 벗어나는 행위가 바로 걷기다. 불안 속에 움츠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불안과 맞짱 뜨는 것이 걷기다. 1초 후에 눈앞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미리 안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업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매 순간 ‘지금-여기’를 수용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걷기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걷기는 삶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차분히 준비하고, 걷고(살아가고), 주어진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이런 경험을 일상 속에 녹여 살아가며 삶의 지혜를 체득하게 된다.    

  

 어제 몸을 점검하기 위해서 서울 둘레길 구간 중 봉산, 앵봉산을 다녀왔다. 약 10km에 달하는 산길이다. 천천히 걷기로 마음먹고 여유롭게 걸었다. 오르막길이 그다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호흡도 매우 안정적이다. 그간 가끔 이 길을 걸으며 호흡이 거칠어지고 힘들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빨리 걷고 끝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길을 걸을 때에는 빨리 가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과정을 즐기면 훨씬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천천히 걸으니 자주 걸었던 길임에도 보지 못했던 사물과 풍경이 보인다. 소리에 집중하며 걸으니 들리는 소리가 점점 더 많아진다. 몸의 감각에 집중하며 걸으니 몸과 대화를 하며 걸을 수 있다. 이번 남파랑길도 천천히 여유롭게 걸으며 몸과 대화하고, 자신과 대화하고, 자연과 대화하며 걷고 싶다. 일주일이라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모든 구속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기간이다. 이 자유를 한껏 누리고 싶다. 잃어버린 자유를 걸으며 되찾고 싶다. 나의 자유를 빼앗은 것은 스스로 만든 구속이다. 가정, 사회, 사람, 주어진 상황 등 주변의 모든 것은 결국 나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제 그 구속의 사슬을 길을 걸으며 서서히 끊어 내거나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느슨하게 만들고 싶다. 이번 남파랑길에서 어떤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 또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지낼지 궁금하고 불안하며 동시에 기대된다. 불안과 궁금함과 기대라는 구속을 걷기를 통해서 풀어나간다. 멋진 계획이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