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한 명과 길 안내자가 남파랑길 구간 중 ‘고성 ~ 통영’ 길을 걷고 있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우연히 틀었는데 걷고 싶은 길 영상을 보게 되었다. 전에 받아 놓았던 코리아 둘레길 종이 지도를 펼쳐놓고 그 구간을 확인하며 이 길을 꼭 걸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경기 둘레길을 마친 후 이어서 코리아 둘레길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매월 일주일 정도 걸으면 3년에서 4년 정도 걸리는 긴 프로젝트다. 아내와 상의했는데, 아내 허락을 받지 못했다. 집을 너무 자주 비우는 것이 싫고, 혼자 집에서 지내는 것이 불안하고 힘들다고 했다.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고, 굳이 아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고 싶지 않기에 계획을 포기했다. 그 이후 삶의 동력이 떨어지며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재미없고 길을 걸어도 예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가만히 그 이유를 들여다보니 코리아 둘레길을 걷는 설렘과 기대, 그리고 희망이 꺾인 것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아내가 싫어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를 찾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며 지내고 있었다. 근데 오늘 TV를 시청하며 반드시 이 길을 걷겠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이 길을 꼭 걸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걷고 싶다는 강한 욕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걸어야 할 길을 살펴보았다. 어플인 ‘두루누비’를 열어 따라가기도 실행해 보았다. 그러면서 하고 싶은 일, 즉 걷고 싶은 길을 다시 찾았다는 벅찬 마음과 설렘이 올라왔다. 설렘을 느껴본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다.
아내가 10월 초순에 고교 동창들과 일주일 정도 유럽 여행을 간다. 이 기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낼까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가까운 친구가 원주에 있는 자신의 농막에 며칠 머물며 치악산 둘레길을 걷자고 했다. 또 다른 길동무는 2박 3일 일정으로 텐트를 짊어지고 서해랑길을 같이 걷자고 했다. 무척 고마운 친구들이고 제안이다. 하지만, 갑자기 며칠 전부터 혼자만의 여행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최근에 지인의 페이스북에서 본 '고령 지산군 가야 고분군' 사진을 보면서 이 고분군을 혼자 다녀올까 생각도 했었다. 여러 가지 계획을 놓고 고민하고 있던 중 오늘 TV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 이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른 계획들은 우선순위가 밀려나게 되었다. 서해랑길을 오랜 길동무와 함께 텐트 짊어지고 길에서 자고 걷고 하는 멋진 계획을 취소했다. 친구에게 혼자만의 여행을 하고 싶다고 양해를 구했고, 그 친구 역시 홀로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흔쾌히 이해해 주었다. 원주 농막 친구의 제안은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농막을 만든 지 3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오픈할 때 한번 가보고는 함께 가자고 할 때마다 동참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삼일 정도 머물며 친구와 하고 싶은 얘기도 하고, 술도 한잔 하고, 치악산 둘레길도 걸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농막에 이삼일 정도 머문 후 원주에서 바로 부산으로 가서 남해랑 길을 걷기 위해 농막에 갈 때 아예 배낭을 꾸려서 걷기 편안한 복장으로 갈 생각이다. 한 5일 정도는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 25km 정도 걷는다고 생각하면 120km 정도 걸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매월 한두 번 2박 3일 일정으로 이 길을 걷고 싶다. 아내도 이 정도는 이해해 주고 허락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걸을 때는 산티아고에서 그랬듯이 오후 5시 이전에 보이는 숙소에 머물고, 다음 날 아침 6시경 출발해서 하루 종일 걷고 싶다. 배낭에는 한 끼 분량의 식사 대용물을 들고 다니고, 충분한 물과 간식을 준비해서 걸을 계획이다. 옷은 입고 있는 옷 외에 여벌로 두 벌 정도 준비하면 될 것 같다. 가능하면 배낭 무게를 줄이고, 불필요한 물품을 들고 다니지 않도록 짐을 꾸리는데 신경 쓸 계획이다. 산티아고 걸을 때는 완보를 목표로 너무 열심히 그리고 빠르게 걸었다. 주변 환경을 둘러보거나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마치 금기시하듯 오로지 걷기만 했다. 하지만. 이번 길은 천천히 유유자적하게 걷고 싶다. 중간에 전망 좋은 카페가 나오면 차 한 잔 음미하기도 하면서 걷는 과정을 즐기고 싶다. 좋은 길동무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 수다도 떨며 주어진 환경을 충실하게 맞이하며 걷고 싶다. 매일 어디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천천히 길을 음미하며 걷고 싶다.
남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해남 땅끝 마을까지 남해안을 따라 총 90개 코스로 이루어진 둘레길이다. 전 구간 거리는 1,470km에 달한다. 이 길을 매월 한 두 차례 2박 3일간 걸으면 언제쯤 끝날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10월 아내 여행 간 기간을 이용해서 걷기 시작할 것이다. 시작하면 언젠가는 끝이 난다. 그리고 이런 일에는 제법 익숙해져 있다. 일단 시작한 일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끝까지 하는 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해 온 적도 있다. 때로는 모든 상황을 무시하고 하고 싶은 일만 했던 기억도 있다.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억지로 견뎌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은 일은 하며 살고 싶다. 그 일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면 굳이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다만 아내의 허락 하에 하고 싶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내다. 아내가 허락하길 바랄 뿐이다.
걸을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 설레는 것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요즘 설렐 일이 없어서 다소 심심하고 재미가 없었는데, 설레는 일을 찾으니 활기가 돈다. 웃기는 일이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설렘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즐겁고 기분이 좋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프로젝트를 생각하며 설레고, 걸으며 행복하고, 걷고 나서 글로 정리하며 추억을 남길 생각을 하니 이 또한 큰 즐거움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마치 아내가 나의 길을 막고 있다는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아내는 결혼 후부터 앞으로 죽을 때까지 쭉 나의 편이자 든든한 지지자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믿음에 흔들린 적이 없다. 다만 아내는 나의 건강과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한 불안함을 늘 갖고 있기에 오랜 기간 자주 집 비우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써놓고 싶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 1949 ~ 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 글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유명한 작가이며 마라토너이다. 마라톤을 시작한 이유는 글을 평생 쓰기 위해서였다. 마라톤은 그에게 작가의 힘을 길러주었고, 덕분에 그는 지금도 건강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게 ‘마라톤=창작활동=작가’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즉 무라카미 하루키의 정체성은 프로 작가이자 아마추어 마라토너이다. 비록 아마추어 마라토너이지만, 일부 프로 마라토너보다 더 많은 완주를 한 러너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25회 이상 완주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걸은 적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뛰었다. 묘비명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살아온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솔한 묘비명이다.
그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약 삼 년 전에 읽었고, 최근에 다시 읽었다. 그의 묘비명을 떠올리며 나의 묘비명을 생각해 본다. “이휘재, 걷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상담심리사, 1957~20**,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은 적은 없었다.” 전문 트레커라고 하기에는 전문성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다. 작가라고 하기에는 아직 햇병아리 아마추어 작가에 불과하다. 그래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맞는 표현이다. 상담심리사는 지금도 상담을 진행하고 있고,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니 맞는 표현이다. 아쉬움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작가 반열에는 들고 싶다. 전문 트레커는 아니지만, 그래도 걷기 하면 ‘걷고 이휘재’가 떠오를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 되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보다 아홉 살 많다. 그는 이미 작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마라토너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유명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굳혔다는 사실이 부럽다.
상담심리사로서 좀 더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지금도 나름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상담심리사라는 역할은 끝가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사명감은 아니지만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고 살고 싶은지,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 코리아 둘레길을 걷겠다는 이유도 어쩌면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좀 더 많은 길을 걷고, 글로 정리해서 책을 발간하고 싶은 마음 역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편이다. 남파랑길을 완보한 후 ‘나를 찾아 떠나는 남파랑길’이라는 책을 쓰고 싶다. 그리고 이어서 해파랑길, 서해랑길, 그리고 평화의 길을 모두 완보한 후 책을 각각 한 권씩 쓰고 싶다. 그렇다! 길을 걷는 행위는 나를 찾아 나서는 행위다. 나를 찾는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의미다. 걷는다는 행위는 내가 무엇인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했고, 어떤 일을 할 사람인지 등등 자신의 길을 알기 위한 방편이고, 그 길을 걷고 싶어 하는 몸부림이다.
젊어서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야만 했다. 사회생활 정리 후 그간 쌓아놓았던 정체성을 부수는 작업을 시작했다. 자신의 틀을 부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한편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수는 작업을 진행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다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이상한 작업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은 곳에서 또는 멀리서 바라보면 순리대로 가고 있는 매우 단순하고 명확한 길이다. 내가 걷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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