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서 남파랑길을 걷기 위해 부산으로 향한다. 집을 나서는데 아내 생각이 갑자기 난다. 아내는 일주일간 여행을 위해 고교 동창들과 함께 어제 출발했다. 아마 결혼 후 가장 긴 기간 집을 비우는 것 같다. 결혼한 지 38년이 되었지만, 집안일하느라 정작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아 많이 미안하다. 이런 여행을 기획하고 함께 떠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무척 다행스럽고 고맙다. 부디 친구들과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오면 좋겠고, 돌아오면서 다음 여행을 약속하고 오면 더욱 좋겠다. 결혼 초부터 늘 혼자 밖으로 돌아다녀서 아내와 함께 한 추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와 단둘이 여행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때로는 함께 때로는 따로 여행을 하는 것을 선호한다. 홀로 집을 나서며 아내 생각에 갑자기 울컥해진다. 부부는 서로 반쪽이 아니고 이미 나눌 수 없는 하나다. 울컥함은 허전함과는 느낌이 다르다. 아내가 없다는 허전함보다는 이유 없는 울컥함이 더 강하게 먼저 올라온다.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으로 가다가 아내라는 존재는 ‘공기’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평상시에는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공기지만, 공기가 희박해지거나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집안일하는 아내는 공기처럼 티가 나지는 않지만 늘 존재하고 있어서 평상시에는 그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아내가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하다. 아내의 즐거운 여행과 추억을 기원한다.
남파랑길 1코스는 부산 오륙도 공원에서 출발해서 부산역까지 가는 길이다. 부산역에 내려서 시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보다는 부산역에서 오륙도 공원까지 역방향으로 걷기로 결정했다. 입간판이 역 앞에 서있는데 지나쳤을 정도로 간판의 존재감이 없어 보이고, 위치도 마치 다른 곳에 서 있는 것 같다. 앞으로 5일간 온전히 걷기에만 빠져 지낼 수 있어서 마음이 한가롭고 여유롭다. 반면 약간의 긴장감과 불안감도 있다. 안내 리본이 잘 달려 있어서 길을 찾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또한 ‘두루누비’라는 어플을 이용하면 길을 놓치지 않고 잘 찾아갈 수 있다. 단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어플로 지도를 보며 걸으니 주변을 구경할 여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길과 어플에 익숙해지면 좀 더 여유롭게 주변 경치도 즐기며 걸을 수 있을 것이다. 5일간 7개 코스, 117.7km를 걸었다. 하루에 약 8시간 정도 걸었고, 매일 약 24km 정도 걸었다. 코스는 재밌고 다양하게 잘 만들어져 있다. 주변 산길도 걷고, 공원과 시내를 통과하고, 재래시장이나 공장 지대도 지나고, 해변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 등 다양한 코스로 구성해서 지역의 구석구석을 체험할 수 있다.
이 길을 걸으며 걷는 사람들을 거의 볼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들 역시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편안한 일부 구간만 달리는 것 같다. 산길을 걸을 때는 하루 종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한 날도 있다. 동네 주민이 동네 뒷산이나 공원 정도 걸을 뿐, 나처럼 남파랑길을 걷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사흘 째 되는 날 60대 친구 다섯 명이 함께 걷는 것을 보았다. 남파랑길을 지속적으로 걷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았고, 경치 좋은 곳을 여행 다니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 외에 남파랑길을 또는 코리아 둘레길을 완보하기 위해 다니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이 좋은 길에 걷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비록 5일간 걸었을 뿐이지만, 이 길은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멋진 길이다. 해안가만 걷는 길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의 삶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길이다. 산티아고 길은 순례의 길이다. 그에 비해 남파랑길은 해안의 경치를 즐기며 동시에 삶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티아고에는 가리비가 순례자의 표식이다. 경기둘레길은 연두색과 빨간색 두 개의 리본이 이 길을 걷는 표식이다. 남파랑길을 걷는 표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배지건, 리본이건, 아니면 간단한 상징물이든 상관없다. 이 표식으로 남파랑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것을 서로 알아볼 수만 있어도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좋은 길동무가 될 수도 있다.
아직 이 길은 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는 않다. 길 중간에 숙식을 제공할만한 곳이 많지는 않지만, 검색을 통해서 코스 시점과 종점 또는 걷는 중간에 식당과 숙소를 찾을 수는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외국인의 경우 안내자의 도움 없이 여정을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접근성이 편안한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우리에게도 불편할 정도이니 외국인들에게는 더욱 불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록 짧은 기간을 걸었지만, 이 길을 국내외인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알린다면 산티아고 길처럼 유명한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길을 걸으며 어떻게 홍보할 수 있고, 함께 걸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매일 걸으며 찍은 사진을 동영상으로 편집에서 유튜브 ‘걷고의 걷기 일기’에 올리고 있다. 영상 소개를 국문과 영문으로 간단하게 올렸다. 이 길을 국내외인에게 홍보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2막 3일이나 3박 4일 일정으로 이 길을 계속해서 걸을 것이다. 1,470km에 달하는 긴 여정이어서 기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끝까지 완보할 것이고, 이어서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걸을 것이다. 몇 번 더 걸은 다음에 함께 걷는 방법을 연구해 볼 생각이다. 이번에 떠오른 아이디어는, 교통편과 숙박 예약은 각자 하고, 코스 시점에서 만나 종점까지 함께 걷는 방법이다. 홀로 걷고 싶지만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나 걷고 싶은데 길을 몰라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함께 걷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걷고 싶은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교통과 숙박을 예약하면 되고, 시점에 정해진 시간까지 도착하면 된다. 자신의 일정에 따라 하루 걷고 싶은 사람은 하루 걷고 가면 되고, 더 걷고 싶은 사람은 남아서 걸으면 된다. 현재 ‘걷고의 걷기 학교’라는 밴드페이지 구독자 수는 2,558명이다. 그 외에 브런치나 페이스 북, 네이버 블로그 등 sns할동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남파랑길을 함께 걷자는 글을 올리면 처음에는 사람들 수가 별로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들의 참여를 위해서 영문으로 작성해서 올리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이 좋은 길을 알리는 것이 내가 할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파랑길은 멋진 길이다.
홀로 이 길을 걸으며 가끔 길을 놓치거나 방향을 잘못 잡아서 헤맬 때도 있다. 그때 반대 방향 표식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다. 순방향으로 가는데 표식을 못 찾거나 보이지 않을 때 주변을 살피며 역방향 표식을 찾은 후, 내가 갈 방향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삶 속에서 기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위주가 되어 남과 상황을 평가하거나 판단한다. 그것이 지닌 오류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다가 힘든 상황에 처할 때 상황을 돌이켜보거나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며 자신의 위치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때 기준이 되는 것이 타인 시점이다. 자신의 시점에서 벗어나야만 보이는 시점이다. 순방향에서 길을 잃을 때 역방향을 기준 삼아 방향을 잡을 수 있듯이, 삶 속에서 헤맬 때, 자신의 시각을 던져버리고 타인의 시각에서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삶의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다. 순방향으로 걷다가 보이는 역방향을 가끔 무시하곤 했는데, 길을 걸으며 역방향 표식의 중요성과 고마움을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이번 여정의 큰 소득이다.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그것도 자세한 일정을 잡거나 세부 계획을 잡지도 않고 떠나면 기대와 불안, 이 두 가지를 안게 된다. 5일간 남파랑길을 걷기 위해 준비한 것은 휴대전화에 두루누비 어플을 설치한 것과 부산행 기차표와 첫날 묵을 숙소 예약이 전부였다. 다른 것들은 걸으며 현장에서 해결했다. 아침은 간단히, 점심은 식당에서, 저녁은 되는대로 먹으며 걸었다. 빨래는 대충 샤워하며 소금기만 없앴고, 양말을 비누칠로 대충 빤 뒤 배낭 뒤에 묶어서 걸으며 말렸다. 이 길을 걸으며 산티아고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먹고, 자고, 씻고, 빨래하는 것, 이것이 걸으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불필요하다. 따라서 불필요한 생각이나 걱정거리는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홀로 걷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있었다. 특히 산길을 걸을 때는 괜한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 이번 길에서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이 또한 큰 소득이다. 혼자 길을 떠나서 걷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함께 걷는 즐거움도 좋지만, 홀로 걷는 자유로움도 좋다.
부산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대학 후배인 친구가 부산에서 살고 있는데. 이번에 부산에서 만나 아주 후한 대접을 받았고, 그 후배 집에서 잠까지 잤다. 남의 집에 머무는 것을 불편해하는 성격이지만, 후배의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 아침 식사까지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고 환대를 해준 제수씨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 서울에서 근무하다 갑자기 부산으로 내려와 두 아이를 훌륭한 수영 선수로 키운 지인을 만나 지난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숙소까지 차를 몰고 와서 부산역까지 데려다주면서 걸을 때 필요한 간식까지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고맙다. 대접과 선물은 정성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매우 소중한 마음의 표현이다. 두 지인 덕분에 이번 여정이 더욱 행복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만나고 있지만, 가끔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굳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 비록 수년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언제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편안하고 소중한 인연도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다. 그리고 관계에서 조금은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정말 소중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며 걷는다. 그리고 과연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정성과 사랑을 쏟은 적이 있는가에 대한 반성도 하며 걷는다. 길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과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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