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을 한 시간 정도 하며 전강 선사의 법문을 듣는다. 화두 참선법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1972년도에 하셨던 법문을 약 50년이 지난 지금 개천가를 걸으며 듣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진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이미 고인이 되신 선사의 법문을 녹음해 놓아서 지금이라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유행하는 것은 매우 생명이 짧다. 노래, 음악, 영화, 서적 등 불과 반년도 넘기지 못한 채 사라지기도 한다. 그에 비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는 법문도 있고, 고전이라는 책이나 영화 역시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주변에 항상 함께 머물고 있다. 고전이 고전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세월을 뛰어넘어 살아남아야만 된다. 지속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고전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선사의 법문을 들을 수 있어서 매우 감사하고, 특히 화두 참선에 관한 귀한 법문을 들을 수 있어서 행운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좋은 법문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찾거나 구해서 듣지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불법을 구하는 신심이 있고, 그 신심이 송담 스님과 전강 선사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큰 법은을 받은 것이다. 법은에 보답하는 길은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수행해서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 법문 중 두 가지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한 가지는 ‘이 뭣고’ 화두법이다. 화두를 드는 방법을 오랜 기간 찾기도 했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기도 했다. 성철 스님께서는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라고 하며 화두를 들라고 하신다. 송담 스님께서는 날숨과 함께 ‘이 뭣고?’라고 화두를 들라고 하신다. 전강 선사께서는 ‘이 뭣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화두를 들라고 하신다. 세 분의 말씀이 다른 것으로 순간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다. 따라서 고우 스님이 순수하게 화두만을 들라는 말씀도 저절로 쉽게 이해가 된다. ‘이 뭣고?’ 화두 드는 방법에 어떤 의심도 생기지 않고 이제야 방법을 찾았다는 확신이 든다. 조용히 앉아 화두를 든다. 다른 잡념이 올라온다. 그 잡념을 알아차리고 다시 날숨에 화두를 든다. 굳이 의심을 만들 생각조차 하지도 않고 그냥 순수하게 화두만을 든다. 가끔 식사를 할 때나, 걸을 때 등등 수시로 화두를 들어본다. 금방 사라지지만 다시 든다. 반복 수행이 필요하다.
다른 한 가지는 우리 몸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이’와 우리를 위해 평생 희생만을 하는 ‘소(牛)’ 중 ‘이’를 위해 기도하고 축원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대상들에게 나쁜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기쁜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씀이다. 이 법문을 들으며 달라이 라마의 기도문이 떠올랐다. “(중략) 다른 사람이 시기심으로 나를 욕하고 비난해도 기꺼이 그들의 사나운 말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돌려주겠습니다. 내가 늘 도와주고 희망을 걸었던 사람이 나에게 심한 고통을 줄지라도 그를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겠습니다. (중략)” 나에게 괴로움과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스승으로 모신다는 말씀과 ‘이’에게 축원을 하라는 말씀이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존재들이 나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다. 번뇌를 바탕으로 마음 밭을 경작할 수 있다. 번뇌가 없다면 또는 떠오르는 잡념이 없다면 수행의 기반이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우리의 스승이 되고,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과 상황은 공부의 큰 초석이 된다.
화두 참선법과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과 상황이 공부의 핵심이다. 바른 공부법은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바른 공부법을 배우기 위해서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비록 지금 전강 선사는 이승에 계시지 않고, 송담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없지만 녹음 법문을 통해서 스승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된다. 10년 전에 송담 스님으로부터 직접 화두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허송세월을 보낸 후 지금에야 화두를 들고 있다. 송담 스님의 법문도 듣고, 전강 선사의 법문도 듣는다. 지금 듣고 있는 법문은 모두 화두 참선법이다. 집중적으로 화두 참선법에 대한 법문을 듣고 있다. 성철스님과 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법은 책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화두 참선법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네 분의 스승님들은 모두 끊임없는 공부를 강조하신다. 이 화두 조금 들다 잘 안되면 다른 화두 드는 것을 삼가야 하고, 잘 안되더라도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비록 스님들께 직접 여쭤볼 수 있는 인연은 없지만, 녹음 법문과 서적을 통해서 공부법을 배울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고 행운이다. 꾸준히 화두를 들고 수행하면 언젠가는 화두를 타파할 날이 올 것이다. 화두 참선을 하기 위해서 생활의 단순화와 일상 속 경계에 걸리지 않는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화두 참선은 좌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즘 상담 선생님 두 분과 함께 공부하고 있는 ‘심리 도식 치료’는 매우 적절한 시기에 만난 책이다. 심리 도식 치료는 상황과 사람들과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자신만의 패턴에서 벗어나는 치료 방법이다. 치유를 위해서 치료자와 내담자는 함께 노력하며 패턴을 찾아내고, 이해하고, 어떤 상황에서 패턴이 활성화되는지 알아차리는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이후에 반복적이고 자동적인 반응 대신 스스로 삶의 긍정적 변화를 위한 선택적 반응을 하는 연습을 통해 과거의 부정적인 태도와 언어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나는 치료 방법이다. 이런 방식은 화두 참선법과 매우 같다. 잡념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 빨리 알아차리고 다시 화두로 돌아오게 되면 그 순간이 바로 지옥에서 벗어나고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즉 ‘참 나’를 만나는 일이다. ‘참 나’라는 존재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참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개혁을 이루는 것이다.
굳이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까지 하지도 않는다. 그냥 일상 속에서 경계에 끌려 다니지 않고 늘 평온함을 유지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수처작주의 삶을 살고 싶다. ‘거짓 나’로부터 해방되어 ‘참 나’로 살고 싶다. 종이 주인을 부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모습을 되찾고 주인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번뇌, 잡념, 고통, 욕망, 분노, 어리석음 등은 저절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주인이 되면 저절로 이들은 사라지게 된다. 조명이 켜지면 어둠이 사라지듯. 할 일은 매일매일 꾸준히 수행하고 일상 속 자신의 마음 밭을 화두로 경작하는 일 밖에 다른 할 일은 없다. 전강 선사의 법문에 감사를 드린다. 선사의 화두 참선법 녹음 법문이 몇 가지 더 있다.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들으며 화두 참선법에 대한 이해를 더욱 공고히 할 생각이다. 확실한 이해를 통해서 믿음이 생기고, 믿음은 공부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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