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혼자 하루를 보내는 날이다. 아침 6시에 기상해서 두 시간 정진했다. 화두 대신 다른 잡념이 들끓는다. 몸이라도 안정되게 앉으려 애썼다. 앉는 것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갑자기 마조 스님 일화가 떠오른다. 앉아서 좌선만 하고 있는 마조 스님 앞에 스승이신 남악 회양 선사께서 기왓장을 갈고 계셨다. 마조 스님이 무엇을 하느냐 여쭈었다. 선사께서는 기왓장으로 거울을 만들려 한다고 대답하셨다. 기와가 어떻게 거울이 될 수 있느냐고 여쭙자 앉아서 좌선만 한다고 부처가 되느냐고 일침을 가하신다. 그러신 후에 선사께서는 소가 끄는 수레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소를 때려야 하느냐 아니면 수레를 때려야 하느냐고 가르침을 펴신다.
요 며칠 마음이 시끄러운 일들이 화두 대신 잡념을 불러왔다. 사실 별일 아닌 일인데도 쉽게 마음이 흔들린다. 공부의 기초가 약해서 일어난 일이다. 시끄러울 뿐 아니라 벌써 사람들이 그리워지기도 하고 술 한 잔 생각이 나기도 한다. 습관이 무섭다. 불과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습관의 마구니가 주인을 끌고 다니고 종 부리듯 하고 있다. 그나마 외부 개인적인 일들을 피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개인적인 모임은 술과 연결되고, 술은 쓸데없는 말을 만들고, 그 말들은 마음을 흔들고, 흔들린 마음에는 고요함이 머물 곳이 없다. 오랜만에 홀로 보내는 오늘 하루가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가끔 홀로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다.
아침 식사 후 상담 전공 스터디 모임 발표를 위해 책을 읽었다. ‘심리도식치료’라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불교 상담을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지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심리 도식은 자극에 반응하는 패턴과 같다. 그 패턴은 일관성을 갖고 있고, 일관성은 패턴을 강화시키며 변화에 저항하게 만든다. 즉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게 되고, 더 고착화되어 변화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있다. 하지만 이미 형성된 심리 도식에 의해 자극 발생 후 1초 이내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며 후회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옳다고 합리화를 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간격을 조금 길게 만들면 같은 반응 양식을 취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즉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마음공부는 ‘설익은 것 익게 하고, 익은 것 설익게 만든다.’는 말씀은 참 기가 막힌 표현이다.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마음공부라는 것이고, 마음공부는 우리의 삶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건강한 방법이다.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불교 용어가 떠올랐다. ‘유식(唯識)’과 ‘사띠(sati)'다. 심리 도식은 유식학의 아뢰야식과 관련이 있다. 이미 우리 내부에 쌓인 수많은 경험, 인식, 사고, 신체 감각들이 아뢰야식에 쌓인 내용물이다. 자극을 받으면 자극과 관련된 내용물들이 따라 올라오고, 그 내용물들이 모여 다른 변형된 내용물을 만들어 다시 아뢰야식에 쌓아놓는다. 심리 도식의 변화는 아뢰야식이 변화와 관련성이 깊다. 아뢰야식이 모두 비워지면 부처가 되고, 심리적인 문제는 저절로 사라진다. 완전히 비울 수 없기에 일상생활과 관련된 만성적이고 역기능적인 패턴을 변화시키는 것이 심리 도식 치료의 핵심인 것 같다. ’사띠‘는 ’ 알아차림‘, ’ 마음 챙김‘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는 알아차리는 마음 챙김을 꾸준히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극을 알아차리면 반응을 즉각적으로 하지 않고 약간의 시간 간격을 만들 수 있다. 이 시간적 간격을 활용해서 자신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 자각의 힘은 반응의 강도를 줄이고, 반응의 빈도를 줄이고, 지금까지 해온 패턴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아뢰야식을 비워내고 사띠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작업이 바로 참선이고 명상이다. 특히 화두 참선은 집중 명상으로 올라오는 아뢰야식의 내용물에 따라가거나 반응하지 않고 화두를 들면서 내용물이 힘을 쓸 수 없게 만든다. 조용히 참선을 하면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심층 의식에 있는 내용물들이 수면 위 표층 의식으로 올라온다. 그때 표층 의식에 올라온 생각들을 따라가거나 연이어 생각하지 않고 화두를 들면 떠오른 표층 의식은 사라진다. 그만큼 아뢰야식이 비워지는 것이다. 화두를 꾸준히 들고 있기 위해서는 사띠가 필요하다. 올라오는 생각을 빨리 알아차리고 그때 바로 화두를 드는 지속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화두가 순일하게 끊이지 않고 들리면 떠오르는 표층 의식들은 힘을 잃고 저절로 사라진다. 이 책을 공부하며 불교 상담이 치유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 초보 단계에 불과하지만 관련 전공 서적을 통한 공부와 유식학에 대한 집중적인 공부를 통해 불교상담 기법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안거 기간 동안 정진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수행이지만, 상담사로서는 내담자에게는 치유의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경험에 충실한 반응을 한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배고프면 울고, 몸이 아파도 울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운다. 그때 불편한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충족시켜주면 아이는 금방 마치 아무 일도 없듯이 웃고 즐겁게 뛰어다니며 논다. 자신이 지금 현재 느끼고 있는 자극에 합당한 반응을 한다. 거기에는 어떤 방해물도 없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겁에 질려 표현을 하지 못하거나, 상황에 맞춰해야만 하는 어떤 태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경험과 느낌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어릴 적 이런 건강한 경험은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믿음으로 작용하며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반이 된다. 우리의 심리적 고통의 대부분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방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제약 속에서 살아가야 하면서 심리적 고통이 발생한다. 과거나 미래가 현재를 억압하고 있다. 현재에 충실하게 살게 되면서 과거나 미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불교 명상인 참선 수행이 바로 이런 면에서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점심 식사 후 뒷산인 봉산에 올랐다. 집에서 분수대까지 왕복에 걸리는 시간이 몇 년 전에는 1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오늘은 2시간 반이나 걸렸다. 몸의 노화현상도 있고, 송담 스님 법문을 듣고 가느라 조금 천천히 걸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송담 스님의 화두 참선법 A-E를 모두 들었다. 이제야 화두 드는 법을 확실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의심과 변덕이 많은 우리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목이 쉬도록 말씀하신다. 스님의 수고로움이 오히려 송구스럽다.
봉산에는 올해 단풍이 마지막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해 지기 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듯이, 단풍 역시 지기 전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예전에 비해 두 배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산행으로 조금 기분이 처졌는데, 단풍을 보는 즐거움에 빠져 처진 기분은 사라지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춤이라도 추고 싶다. 늙은 몸과 어린이 마음, 이 조합도 좋다. 나이 들어가며 마음까지 늙어 가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할 것 같다. 비록 얼굴과 피부는 쭈글쭈글해지고 쳐지고 허리는 굽더라도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머물고,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동심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 오늘 하루는 충만한 하루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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