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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일기

<나를 찾아 떠나는 동안거 2022> 화두 참선 수행 삼요

by 걷고 2022. 11. 15.

녹음 법문이 담긴 Sd 카드를 휴대전화에 삽입한 후 처음으로 법문을 듣는다. 예전에 들었던 ‘송담 스님의 참선법’ 법문이다. A – E 총 5개의 법문 중 오늘 A를 들었다. 약 1시간 30분 정도 말씀하신 법문이다. 법문을 듣다가 잠시 잠에 빠졌다. 다시 일어나 정신 차리고 커피 한잔 마신 후 들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일어난 생각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일어나는 생각을 빨리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 화두를 드는 것이 화두 드는 방법이라고 간결하게 말씀하신다. 생각을 없애려 애쓸 필요가 없다. 화두를 들면 생각은 저절로 사라진다. 이 일의 반복이 수행이다.

스님은 사람들을 상근기와 하근기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화두 참선법을 믿고 수행하는 사람이 바로 상근기라고 말씀하신다. 희망의 말씀이다. 그간 공부하다가 쉽게 포기하며 스스로 하근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화두 공부를 시작하고 있으니 스님 말씀대로 나는 상근기에 속한다. 물론 자신이 상근기라는 생각에 빠지면 이 또한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상근기, 하근기라는 분별심을 내려놓고 스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된다.

오전에 참선하는데 갑자기 오래전에 봤던 영화의 폭력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평상시에는 전혀 떠오를 일도 없고, 그 장면을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장면이다. 예전에 스님들로부터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특히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은 뇌리에 깊게 박힌다고 한다. 오늘 참선 중에 떠올랐던 그 장면은 깊게 각인된 하나의 심층 의식이 표층 의식으로 떠오른 것이다. 일상 속 아무 일도 아닌 것조차 모두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이유이다.

매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사라졌다 나타난다. 연결된 생각들도 있고, 전혀 상관도 없는 생각들도 우후죽순처럼 갑자기 떠오른다. 경험이 떠오르기도 하고, 과거나 현재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미래의 불안이 떠오르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 근거도 없는 허황된 망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 망상 역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근거를 잊고 있거나 기억 못 하고 있을 뿐이다. 화두는 들자마자 사라지고 다시 잡념들이 떠오른다. 그 잡념을 알아차리고 다시 화두를 든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수행을 한다.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면 이는 죽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무기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망상은 수행의 기반이다. 생각을 쫓아가거나 생각으로 인해 두 번째 생각을 이어가면 업을 쌓는 일이고,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 화두를 들면 수행이다. 같은 상황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런 상황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올라오는 감정이나 생각이 있다. 그 감정이나 생각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상대방과의 관계도 달라지고 나의 태도 역시 달라진다. 결국 상황이 나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고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나를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상황이나 상대방을 탓하며 두 번째 화살을 맞게 된다. 일상생활이 바로 선불장(選佛場)이다. 부처가 되는 터전이다. 부처가 되느냐 아니면 무지 속에 빠져 지옥에 사느냐의 결정은 결국 자신에게 달려있다. 생각이나 환경 덕분에 우리는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이들 때문에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될 수도 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감사함이 올라온다. 구순이 넘으신 송담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과거 스님의 법문을 녹음해서 들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 게다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닌 전강 선사의 법문도 들을 수 있다니 이 또한 매우 기쁜 일이다. 과거의 스님 법문을 현재에서 듣고 있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 개념이 사라진다.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전강 선사의 법문을 들으며 그 당시 법당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과거의 분위기와 환경을 지금 현재 느낄 수 있다. 공간의 개념도 사라진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진다. 시간이나 공간은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시간은 스스로 지금이 몇 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공간 역시 여기와 저기를 구별하지 않는다. 시간은 우리의 편의를 위해 만든 것에 불과하고, 공간 역시 우리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곳에 불과하다. 시간은 무한하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 역시 무한하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설정한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부처님은 2,500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계신다.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법문으로 존재하신다. 우리는 그 법문에 따라 공부하며 살아간다. 과거의 부처도 없고 미래의 부처도 없다. 다만 현재의 부처만 있다. 법문이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고 계신다. 마찬가지로 송담 스님이나 전강 선사 역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계신다.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 뿐 당신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법문을 펼치고 계신다. 성철 스님이나 고우 스님 역시 여전히 존재하고 계신다. 당신의 법문과 기억에 남는 언행들이 여전히 살아서 춤추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이 춤추고 있으니 죽음과 삶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생사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시공과 생사 역시 우리의 개념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제법무아이다.

불교 수행은 또는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이 이치를 깨닫는 방편이다. 모든 것은 연기로 존재할 뿐,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일이다. 생로병사의 근원은 '나'의 존재가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발생한다. 성주괴공의 우주 진리를 알게 된다면 생로병사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순간적으로 모였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런데 어리석음으로 인해 ‘나’라는 존재를 굳게 믿고, 나를 지키기 위해,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뛰어나게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삶을 마감한다. 부귀와 명예가 주인이 되고 우리는 종이 된다. 주인과 종이 바뀌는 이상한 현상이다. 모두 부귀와 명예의 종이 되기 위해 몸 바쳐 충성한다. 스스로 주인이라는 지위를 발로 차고, 종의 삶을 추구하며 울고 웃고 있다. 부귀와 명예가 웃으면 종이 된 우리도 웃고, 사랑과 권력이 울면 우리도 따라서 운다. 화두 참선은 자신이 주인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 또는 주인 자리를 되찾는 가장 좋은 방편이다. 그간 종으로 살아왔던 자신에게 강한 분노를 표현해야 한다. 대분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자신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대신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간 종이 된 이유를 확실하게 알기 위해 거짓 주인에 대한 의심을 해야만 한다. 대의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대분심, 대신심, 대의심, 이 세 가지가 화두 참선 수행의 삼요(三要)가 된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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