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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일기

<나를 찾아 떠나는 동안거 > 도화지 위의 그림

by 걷고 2022. 12. 7.

동안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시간이 참 빨리 흐른다. 한 달간 제대로 정진하지 못한 것 같다는 아쉬움이 크다. 정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예전처럼 자신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안거는 산중에서 보내는 것이 맞다는 생각도 든다. 공부의 힘이 없는 초심자가 일상을 영위하며 안거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단 한 가지 금주는 아직까지 지키고 있다. 참선도 비록 적은 시간이지만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 이틀간은 새벽에 나가 늦은 밤에 귀가하느라 정진을 못했다. 오늘은 오후에 일정이 있어서 오전에 정진을 조금 더 하며 이틀간 정진하지 못한 것을 보상(?)하기도 했다.

     

 최근에 갈등의 원인과 해결 방안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 많은 갈등이 주변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같은 상황에서도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예전 같으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이제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 시 상황이나 상황을 만든 사람을 탓하는 것 대신에 짜증이나 화가 나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 환경이나 사람 탓을 하지 않고 왜 그런 상황에서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있다. 불편한 상황이나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모두 마음공부의 스승이 되어가고 있다. 번뇌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듯, 불편한 상황을 통해서 불편한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남아있던 습이 있어서 매번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불편한 마음이 일어나는 횟수나 간격, 감정의 크기는 많이 줄어들었다.      

 

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릴까? 지금까지 찾은 원인은 단 한 가지 때문이다. 바로 ‘나’라는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존재가 실재한다는 잘못된 어리석은 믿음 때문이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의 목숨을 지켜야 하고, ‘나’의 소유물을 지키고 늘려야 하고, ‘나’의 명예를 높여야 하고, ‘나’라는 존재의 위엄과 대단함을 알려야 한다. 이것에 위배되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동원한다. 사람들이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거나, 내 생각에 반대를 하거나, 남이 나를 무시하거나,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화를 낸다. 모두 ‘나’라는 것이 만들어 낸 의지 작용이 원인이다. ‘나’로 인해 업이 발생한다. 만약 ‘나’가 없어진다면 업이 발생할 이유조차 사라진다. ‘나’가 없으니 ‘너’도 없어진다. 이분법적 사고, 즉 ‘나와 너’, ‘옳음과 그름’, ‘높고 낮음’, 밝음과 어두움‘등 모든 상대적인 개념은 ’나‘가 소멸됨으로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갈등도 사라진다. 결국 모든 갈등의 원인은 ’나‘에서 시작된다.      

 

과연 ‘나’는 누구이고 무엇일까?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이니 ‘나’가 아니다. 개명한다고 지금의 ‘나’가 다른 ‘나’가 되지도 않는다. 마음이 ‘나’라면 그리고 ‘나’가 고정된 실체라면 마음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마음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이리저리 날뛰고 있다. 날뛰는 마음 중 ‘나’는 어떤 것일까? 웃고 춤추는 ‘나’만 ‘나’이고, 울고 화내는 ‘나’는 ‘나’가 아닌가? 만약 몸이 ‘나’라면 죽은 후의 몸도 지금처럼 활동하고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죽으면 몸은 조금도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럼 몸도 ‘나’가 아니다. 그럼 ‘나’는 과연 누구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나’라고 생각하는 놈에게 한평생 끌려 다니며 살다가 죽는다. 불쌍한 중생이다.      

 

본성, 불성, 본래면목은 흰 도화지와 같다. 그 도화지 위에 연필로 스케치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물감으로 색을 칠한다. 스케치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물건이다. 그 물건 위에 덧칠을 하며 ‘나’라는 물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림이 돋보일수록 본래 모습인 도화지의 존재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다. 도화지의 본모습은 사라지고 그림만 보인다. 도화지가 없다면 그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화지의 존재는 잊고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나, 남 보기 좋은 그림만 그리려고 평생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그림에 대해 비난을 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칭찬을 받으면 좋다고 웃는다. 하지만 도화지는 그냥 도화지일 뿐이다. 도화지는 변하지 않는다.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는다. 삶과 죽음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다. 사랑과 미움도 없고, 깨끗함과 더러움도 없다.  오직 그것만이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유일한 물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화지는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림에만 정신 팔려 살아가고 있다. 도화지는 갈등이 일어날 일이 없지만, 도화지 위에 그린 그림은 늘 갈등을 발생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없는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갈등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화두를 드는 일이다. 화두는 어두움을 밝게 만드는 빛과 같다. 어리석은 마음을 밝음이 없는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화두는 밝음인 명(明)이다. 갈등 상황이 발생 시 원인을 따지거나, 남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알음알이 대신에 화두를 들면 갈등 상황은 저절로 사라진다. 화두로 갈등과 싸우며 물리치는 것이 아니고, 화두를 들면 갈등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조명이 들어오면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듯이. 안거를 시작한 이유도 어떤 상황에서도 갈등 속에서 헤매지 않고, 경계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어서이다. ‘수처작주(隨處作主)’는 도화지를 되찾는 일이다. 되찾게 되면 ’ 입처개진(立處皆眞)‘, 즉 서 있는 모든 곳이 바로 진리의 세상이 된다. 도화지를 되찾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을 지워야 한다. ’나‘라고 생각해 온 ’나‘를 버려야 한다. 즉,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덜어내는 공부이다. 유위법의 세상에서는 쌓으면 쌓을수록 좋지만, 무위법의 세상에서는 비우면 비울수록 좋다. 비우는 것이 바로 도화지 위에 그린 그림을 지우는 작업이다. 그림을 지우면 도화지 본바탕이 저절로 드러난다.      

 

화두 공부는 끊임없는 의심을 통해서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방법이다. 화두는 도화지의 그림을 지우는 지우개이다. 하지만 잘못 공부하면 지우개의 까만 부분이 오히려 도화지를 더욱 지저분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오늘 들었던 전강 선사의 법문에서 눈 밝은 선지식을 통해서 화두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화두 공부를 하기 위해서 스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강 선사와 송담 스님의 법문이 지금은 내게 선지식이다. 그 스님들을 뵐 수는 없지만, 스님들께서 말씀하신 법문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송담스님으로부터 6년 전 화두를 직접 받았다. 부처님도 부처님 말씀인 법(法)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과 전강 선사는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의 육신만 보이지 않을 뿐 그분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남아있다. 다행스럽게 공부 인연이 조금은 있나 보다. 남은 안거 기간 꾸준히 정진하며 의심이 조금이라도 더 깊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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