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안거일기

<나를 찾아 떠나는 동안거> 치아 스케일링

by 걷고 2022. 12. 14.

매년 연말에 치아 스케일링을 받는다. 스케일링은 치아에 붙어 치주질환을 유발하는 치석 및 치태를 제거하는 예방치료다. 1년 간 열심히 저작운동을 한 치아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보상이다. 치과에 갈 때마다 자꾸 미루게 된다. 전동 드릴이 돌아가는 소리가 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한 치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한다. 불안감과 긴장감을 느끼며 안정을 취하려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기도 한다. 몸이 자꾸 긴장되고 경직된다. 긴장을 느끼면 이완시키기 위해 코로 호흡하며 호흡에 집중해 보지만 긴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의식과 몸의 반응, 느껴지는 감정은 따로 움직이고 있다. 의식이 뇌에 명령을 내려 안정을 취하라고 해도 몸의 반응과 감정은 뇌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다. 몸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또 유전된 DNA 인자로 인해 몸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집중하며 몸을 경직시킨다. 몸의 반응은 불안감과 긴장감, 가기 싫어하는 마음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은 뇌의 명령을 받기보다는 몸의 반응에 따르는 것 같다. 내가 나의 주인임에는 확실하나 어떤 놈이 정작 주인인지는 알 수가 없다. 뇌도 나가 아니다. 의식도 나가 아니다. 몸과 감정 역시 나가 아니다. 과연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동안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오리무중 속에서 헤매고 있다.

혼자 차를 운전해서 처갓집 근처에 있는 치과로 간다. 홀로 운전한 기억이 거의 없다. 옆에는 아내가 늘 타고 있었다. 혼자 운전을 하려니 뭔가 허전하고 약간의 불안감을 느낀다. 익숙해진 것에서 벗어나니 불안함이 올라온다. 혼자 운전하는 홀가분함과 여유로움도 물론 좋다. 아내가 함께 타고 있으면 잔소리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그 얘기가 즐거울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내의 잔소리조차도 삶의 일부가 되었다. 어느새 아내와 나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되었다. 내가 며칠 집을 비우면 불안해하는 아내 마음이 이해된다. 음악을 튼다. CD에 있는 음악은 뭔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피아노 연주 소리가 마음을 때린다. MC에 의하면 이 피아노곡은 빗방울 소리를 표현한 음악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빗소리를 들으며 이 곡을 작곡했고, 어떤 연주자가 연주한 곡을 들으며 나는 빗소리를 듣는다. 전혀 상관없는 환경과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 연결된다.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지, 실상은 이미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음악을 통해 세상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한 치과에 간다. 몇 년 전부터 이 치과를 다니고 있다. 처갓집 근처에 있는 치과로 장모님께서 추천하셔서 다니게 된 곳이다. 장모님 치아 치료를 정성껏 해 주었다는 말을 듣고 이 치과에 다니게 되었다. 치과 한 곳 정하는 데도 많은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 아내와 나, 처남과 처남 식구들 모두 이 치과에 다니고 있다. 매년 연말에 스케일링을 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한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주인을 위해 저작운동을 해 준 치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치아에게 해 주는 보상이다. 또한 그 보상은 앞으로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 달라는 부탁이기도 하다. 기업에서 연말에 보너스를 주는 것처럼 나는 내 치아들에게 스케일링을 해준다. 스케일링을 하는 보조 의사는 꽤 세심하게 스케일링을 한 후에 치아 모형을 들고 나의 잘못된 칫솔질 습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며 좋은 방법을 알려준다. 오른손으로 칫솔질을 하다 보니 오른쪽 끝 부분에 있는 위아래 치아가 깨끗하게 닦여지지 않는다. 익숙한 칫솔질로 인해 한쪽 치아 관리가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습관을 바꿔야 한다. 양손을 써서 칫솔질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양손을 쓰면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하니 일석이조이다. 습관을 바꾸는 일은 다소 성가신 일이기도 하지만, 나쁜 습관을 바꾸지 않고 인생이 변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은 일이다. 어제와 같은 삶을 살면서 인생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동안거 역시 잘못된 삶의 습관을 바꾸기 위한 방편이다. 삶의 습관이 바뀌면 사고와 행동도 변한다. 이 변한 사고와 행동은 사람 자체를 변하게 만든다.

운전해서 돌아오는데 눈발이 날린다. 눈은 나를 향해서 달려오고 나는 눈을 반기기 위해 눈 속으로 달려간다. 휘날리는 눈발의 모습이 마치 눈이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과 함께 춤추듯 운전한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은은한 수묵화를 그려내며 선계를 표현하고 있다. 미세먼지로 인해 더욱 뿌옇게 보여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미세먼지는 우리 일상을 변화시켜 놓았다.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고, 외출을 삼가야 한다. 미세먼지로 인해 청명한 하늘을 볼 수도 없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아마 평생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방독면 같은 마스크나 헬멧을 쓰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위해 온 세계가 노력하고 있다. 어느 정도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한 복구는 불가능할 것 같다. 다만 우리가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복구는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모든 종(種)의 진화과정이자 생존 능력이다.

환경이 오염되듯 우리네 마음도 오염되어 있다. 원래 이미 완전하게 갖추어진 우리의 본래면목은 덜거나 더할 필요가 없다. 이미 완벽하다. 하지만 몸의 욕망과 마음의 변덕으로 가려져 본래면목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울 자체는 깨끗한데 거울에 먼지나 때가 묻어 본래의 깨끗함은 보이지 않고 지저분한 거울의 모습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때가 잔뜩 낀 거울에 비친 자신과 사물의 모습을 보며 그 모습들이 실상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거울에 낀 때로 본래 바탕이 흐려지고, 그 바탕 위에서 환경과 자신을 판단하고, 그 판단이 맞는다고 강하게 우기며 더러운 때를 덧칠하고 있다. 우리네 삶은 깨끗한 거울을 더럽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언젠가 문득 정신 차리고 나서 스스로 더럽힌 거울을 닦는다고 난리를 친다. 마치 생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든 후, 그 부스럼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치료를 하느라 동분서주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치료가 된 후에는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주변에 자랑을 하기도 한다. 애초에 긁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동안거를 하는 이유 역시 스스로 만든 부스럼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이미 생긴 부스럼이야 시간이 지나고 치료를 하면 없앨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앞으로 다시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동안거를 통해 나쁜 습관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이유이다. 몸, 입, 마음으로 짓는 삼업을 조심하여 짓지 않도록 수행해 나간다면 앞으로 부스럼을 만들지 않게 될 것이다. 이미 생긴 부스럼은 참선을 통해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