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어제 아침 기온이 영하 14도, 오늘 아침 기온도 영하 13도. 낮 기온도 영하에 머물며 찬 기운을 뿜어낸다. 어제는 지인 한 명과 함께 한강변을 걷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 헤어졌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옷을 조금 가볍게 입고 나가서 그런지 몸에 한기가 느껴진다. 집에 돌아와 씻고 누우니 추운 몸이 녹고. 긴장된 몸이 이완되며 자연스럽게 잠이 온다. 30분 정도 생각지도 않았던 초저녁 잠을 잤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데 몸 상태가 그다지 편하지 않다. 어제 추위로 인한 여파인 것 같다. 점점 몸이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고, 올해는 작년과 다르게 추위를 좀 더 타는 것 같다. 집안에만 머무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여 체온을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 식사 후에 보온을 좀 더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옷을 챙겨 입고 나와 두 시간 정도 걸었다. 몸에 땀이 나며 컨디션도 좋아지고 소화도 잘 된다. 귀가해서 씻은 후 간식으로 커피와 빵을 먹는다. 커피도 디카페인 커피를 마신다. 오후에 일반 커피를 마시면 잠을 쉽게 못 이루게 되어 오후에는 디카페인 커피를 마신다. 이 역시 노화 현상으로 인한 몸의 변화이다.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생활 방식을 바꾸며 살면 된다.
오늘 걸으며 송담 스님 법문(No. 470)을 들었다. 오늘 법문은 1992년 4월 5일 일요법회에서 하신 법문이다. 30년 전 법문을 지금 들으며 그 당시 법회의 분위기를 느껴본다. 수계 법회인 듯 계율에 대한 법문을 펴신다. 그리고 수계식 후 받는 법명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이름은 부모님이 주신 이름이고, 전생의 이름과 성은 지금과 다르다. 하지만 부처님 제자로서 받은 법명은 자신과 인연에 맞는 법명이다. 법명은 많은 사람들이 불러주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법명은 법천(法泉)이다. 1989년 송광사 단기출가 시 당시 조계총림 송광사의 방장이신 회광 승찬 스님께 받은 법명이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법명이다. 최근에는 이름이나 법명보다 ‘걷고’라는 별칭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다. 걷기를 통해 만난 사람들은 당연히 ‘걷고’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지인들에게는 법명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동안거를 하며 법명을 되찾은 느낌이다.
송담 스님께서는 법문에서 열 가지 나쁜 죄악을 멀리하라고 말씀하신다.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은 세 가지가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일,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몸을 섞는 일,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은 네 가지가 있다. 거짓말, 사람을 이간질시키는 말, 음담패설 같은 말, 욕처럼 나쁜 말이다.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은 탐욕,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이다. 이 십악(十惡)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바로 참선이라고 강조하시며 화두 참선법에 대해 자세하고 친절하게 법문 하신다. 요 며칠간 화두 드는 방법에 대해 의심과 고민을 하고 있었다. 때 마침 스님의 참선 법문을 다시 들으며 흔들렸던 화두 드는 법을 다잡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알겠지만, 또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과정이 되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송담 스님을 직접 친견하고 여쭤볼 수는 없지만,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녹음해둔 덕분에 스님 말씀에 따라 올바른 방법으로 정진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송담 스님에게 화두첩을 받은 날이 불기 2559년 12월 10일이다. 불기 2559년은 7년 전인 2015년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 선배 덕분에 송담 스님을 친견할 수 있게 되었고, 화두도 받을 수 있었다. 송담 스님께서는 노구임에도 화두첩에 나의 법명과 이름을 직접 써 주시며 화두 참선을 꾸준히 하라는 당부의 말씀도 하셨다.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연로하신 송담 큰스님을 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30년 이상 마음속으로 친견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큰스님께서 머물고 계신 사찰에 앉아서 큰스님의 그늘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종종 찾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그 사찰의 주지스님과 인연이 깊은 선배가 나의 마음을 알게 되어 주지스님에게 부탁을 드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스님을 친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스님께서 여러 말씀을 해 주셨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스님 법문을 들으며 그 당시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법문에 들어있어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느라 힘드셨을 것이라는 생각에 송구한 마음만 가득하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동용중수불득(動用中收不得)이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다.
시삼마(是甚麼),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송담 스님께 받은 화두이다. 화두는 스승으로부터 반드시 직접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스승의 말씀을 믿고 스승이 알려주신 방법대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한다. 송담 스님께 직접 화두를 받고,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으니 나름 공부 인연은 있는 것 같다. 비록 지금 공부를 제대로 하지는 못한다손 치더라고 공부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자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과 정신의 뒤에는 ‘자기(Selbst)가 있다. 자기는 감각의 눈으로 찾고 정신의 귀로 듣는다. 자기는 언제나 듣고 있으면서 언제나 찾는다. 그것은 비교하고 강요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지배하며 또한 자아의 지배자이기도 하다. 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형제여,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이 자기다. 그것은 그대의 몸속에 살고 있고, 그것은 바로 그대의 몸이다.” ('차라투수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본문 중, 민음사)
요즘 읽고 있는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이 글을 읽으며 ‘자기’ 가 바로 ‘이 뭣고?’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한다. 서양 철학의 대가와 동양의 수행자가 같은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은 단지 표현 방법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탐구에 대한 방식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모든 철학과 종교는 자신을 찾고 자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문이고 방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을 찾기 보다는 자신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고, 마치 멀어지는 것이 더 잘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또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역할에 충실하고 사회적인 성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꿀벌은 꿀벌로 살아가기보다는 꿀벌이 벌집으로 돌아올 때 꿀을 들고 오는 역할에만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으로 살기보다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화두 공부는 결국 자신을 되찾는 방법이다.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가야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 동안거를 하는 이유는 ‘자신’을 부수고 ‘참 자기’를 만나기 위한 방편이다. 공부 인연이 있어서 고맙고 다행스럽다. 귀한 가르침과 화두를 주신 송담 큰스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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