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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해파랑길 2회 차 후기> 부처님 맞이하는 방법

by 걷고 2024. 5. 12.

시작점인 지하해변에 도착해서 간단히 몸을 풀고 3시 50분에 출발한다. 어둠을 뚫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가로등이 길을 밝혀주어 랜턴은 필요하지 않지만 마음의 랜턴을 밝히고 당당하게 걷고 또 걷는다. 랜턴이, 가로등이 바깥세상만 밝히지 않고 내면을 밝힐 수 있으면 좋겠다. 굳이 왜 이런 새벽녘부터 걸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걸어야만 되고, 걷고 싶고, 길벗들 만나 아름다운 추억을 쌓고 싶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월 2회 무박 2일 또는 가끔 일주일 정도 장기도보를 하며 걸으면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완보하는데 최소한 7, 8년을 걸릴 것이고, 어쩌면 10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기간은 상관없다. 안전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다면, 또 걷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면 기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길을 걸으며 길을 통해 배우고, 길벗을 통해 배우고, 자신의 내면과 직면하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고, 과정을 통해 자신을 절차탁마하며 걷는다. 그리고 도착지점은 다음의 출발지점이 된다. 끊임없는 출발과 도착, 시작과 끝, 태어남과 죽음의 과정을 반복한다. 윤회다. 끊임없는 윤회는 아무리 힘들고 즐거워도 그 과정을 통해 조금 더 사람 냄새를 풍길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자연의 선물이다. 따라서 삶의 고락, 걷기의 고락은 일맥상통한다. 고락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고락의 곡선이 없는 삶은 무기력하다.      

승합차를 이용해서 첫 번 째 해파랑길 걷는다. 시작지점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도착지점에서 다시 우리를 태우고 상경하는 기사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어디서든 출발할 수 있고, 어느 지점에서든 마칠 수 있다. 출발지점은 지난번 걷기의 도착지점이다. 조성해 놓은 해파랑길을 걷고 있지만 코스별 주최 측에서 정해 놓은 시작과 종료 지점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 우리가 그 지점을 정하면 된다. 자유로움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삶의 주인으로 시작과 종료 지점을 선택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 틀이 주는 안정감도 있지만, 틀을 벗어나는 스릴감도 있다. 안정과 불안의 중간 지점에서 자신을 길에 던지며 틀을 부수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지난번 경험을 바탕으로 승합차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함께 내린 결정이다. 우리의 길을 가기 위해 우리가 방법을 만들고, 실천하며,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어느 지점에 도착한 후 다시 시작점까지 와야 하는 번거로움, 그리고 걷기 마치는 지점에서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곳까지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서 좋고, 시간과 경비 면에서도 효율적이다. 걷기 위해 어떤 것도 신경 쓸 일없이 오직 걷기에만 집중해서 걸을 수 있어서 편안하고 좋다. 그리고 그 안에 자유를 느끼며 자신의 주인이 되어간다는 자긍심도 느낄 수 있다.      

길도 여러 가지 길이 있다. 평탄한 숲길, 차가 소음을 내며 달리는 아스팔트길, 제법 높은 산길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단, 숲이 가득한 아름다운 길도 있고, 산의 정상에서 느끼는 정상의 맛도 있다. 힘들고 불편한 과정을 견딘 후 맞이하는 정상과 멋진 숲길은 더욱더 그 즐거움의 크기가 커진다. 가끔 산에서 만나는 주인 없는 묘소 또는 누군가의 묘소를 지나며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있고, 묘지 안의 누군가는 죽어있다. 언젠가는 저 자리가 우리의 미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죽음을 만나기 위해 삶을 살아간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어떤 분명한 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이 흐르는 그 연속선상에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그의 죽음과 상관없이 나의 삶은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내가 죽는 순간에 누군가는 태어난다. 나의 삶과 죽음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다. 세상은 나의 생사와 상관없이 진행된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있기에 온 세상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비록 나에게만 일지라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옆에 함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배우자가 될 것이다. 물론 자식들도 있지만, 이들이 굳이 반드시 나의 죽음의 순간에 함께 있을 필요는 없다. 이미 나의 유전자는 그들의 안에 있기에 함께 있거나 아니거나 별 차이는 없다. 걷기를 마치고 상경하는데 제법 많은 비가 내린다. 세 사람은 남편에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는 부탁을 하고, 남편들은 기꺼이 충주와 죽전 휴게서로 차를 몰고 와서 픽업 서비스를 한다. 보기 좋은 모습이다. 짧게는 20년 이상 또는 30년 이상 함께 살며 삶의 굴곡을 모두 함께 견뎌온 부부가 사이좋게 살아가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 뉴스에서는 이혼율과  비혼주의자가 급증한다는 소식만 전한다. 부인은 걸으러 가고, 남편은 부인을 위해 즐겁게 픽업 서비스를 나오는 훈훈하고 아름다운 얘기는 뉴스에서 찾아볼 수 없다. 사실의 전달이 매체의 소명이라면 부정적인 모습만 실을 것이 아니고 아름답고 멋진 모습도 전해야 하지 않을까? 나만의 생각인가? 아내도 길동무들과 함께 먹으라며 유부초밥과 쌈밥을 준비해 주었다. 아내의 이런 점이 너무 고맙다. 우리 부부 역시 굴곡을 잘 견뎌내고 지금은 비교적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다. 배우자에게 존경과 감사함을 느끼며 서로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죽은 순간에도 무척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삶은 저절로 대물림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며 내면화 작업을 자연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배우자 얘기를 쓰다 보니 재미있는 얘기가 한 가지 떠오른다. 위의 글과 맥이 통하는 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냥 얘기하고 싶다. 네 명의 부인을 둔 한 남자가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첫째 부인에게 함께 가자고 했더니 냉정하게 거절했다. 둘째 부인은 더 단호하게 따라가기 싫다고 했고, 셋째 부인은 문 밖까지 배웅해 주겠다고 했다. 넷째 부인은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다. “고 했다. 네 명의 아내는 육체, 재산, 친인척, 그리고 업보를 의미하고, 먼 길은 ‘저승길’을 의미한다. 죽는 순간 함께 지니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나의 몸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고 친인척도 아니다. 오직 나의 업보 밖에 없다. 업보는 전생으로부터 축적된 나의 삶의 결과물이다. 나의 언행, 생각, 의지, 태도, 느낌, 감정 등 모든 것의 최종 결과물이다. 아뢰야식이 바로 업보의 저장고다. 이미 행한 업은 반드시 업을 받게 되어있다. 어느 누구도 업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부처님께서도 정각을 이루신 후에 두통을 앓으셨다고 한다. 어릴 적 장난으로 나뭇가지로 물고기 머리를 세 번 친 것에 대한 업보를 받으신 것이다.      

 

우리가 걸으며 침묵 걷기를 하며 오감에 집중하는 이유도 업을 짓지 않기 위한 방편이다. 선업도 업보가 있고, 악업도 업보가 있다. 모든 생각은 업을 만든다. 그리고 그 업은 다시 다른 생각과 행동을 재생산하며 다른 업을 만든다. 끊임없는 업보는 윤회를 만들어낸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업보를 피할 길이 없다. 모든 생각과 의도,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업보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무위(無爲)의 행동이 바로 오감에 집중하는 것이다. 오감의 감각은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고 바로 참 자신이다. 불성이고 본성이다. 어떤 의도나 생각, 또는 감정이나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다. 오직 느낄 뿐이다. 감각에 집중하면 생각과 마음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이미 지은 업은 받을 수밖에 없지만, 새로운 업을 생성하지 않는다면 업의 무게는 저절로 가벼워질 것이다. 가벼워진 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수행이다. 걸으며 하는 수행이 바로 마음챙김 걷기다. 걸으며 모든 생각, 감정, 마음의 움직임에서 벗어나 오직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챙김 걷기며 동시에 부처님을 참답게 맞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몸 있는 곳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을 새기며 부처님을 친견하고 찬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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