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다녀온 후 출간한 책을 들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스님을 찾아뵙고 책을 전달해 드린 적이 있다. 스님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신 후에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걸었냐고 질문하셨다. 내 대답은 ‘그냥 걸었다.’였다. 순간 스님의 얼굴에 실망한 모습이 살짝 비쳤다. 장기간 도보 여행을 하면서 화두를 챙기지 않고 그냥 걸었다는 모습이 스님께는 안타깝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근데 ‘그냥 걸었다.’가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완보하기 위해 그냥 매일 약 8시간 정도 걸었다. 산티아고에서 할 일은 걷고, 먹고, 자고, 빨래하는 거 외에 딱히 할 일이 없다. 아무튼 스님의 실망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약간은 서운한 느낌도 있다. 잘 다녀왔고 수고 많았다는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그런 말씀보다는 화두를 챙기지 못한 것을 경책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7년 전 환갑 기념 여행으로 산티아고를 다녀왔다. 길을 걸으며 지난 삶을 한번 중간 정산하고 싶었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거나 어울리는 것을 자제하고 홀로 걷는데 집중하려 노력했다. 길을 걸으며 피곤함이 몰려오면 생각하는 것 자체도 피곤해서 내려놓게 된다. 배고프면 빨리 카페가 나오기를 바라고, 어느 정도 걸은 후에는 빨리 알베르게가 나오길 바라고, 알베르게에 도착해서는 빨리 침대를 배정받아 씻고 쉬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다. 이 순간에 삶의 중간 정산이나 미래에 대한 구상은 사치일 뿐이다. 현실의 갈증을 채우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한 여유나 힘도 없고, 생각조차 하기 싫다. 그러던 중 반나절 동안 희한한 경험을 했다. 지금도 그 경험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전체 일정 중 반 정도 지날 때였다. 갑자기 모든 생각이 끊어졌다. 생각을 떠올리려 해도 떠올랐다 바로 사라진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조차 머물지 않고 사라진다. 머물 자리가 없어 보인다. 일부러 떠올려도 금방 사라진다. 심지어 화두를 떠올려도 금방 사라진다. 이상해서 다시 떠올리려 해도 화두, 감정이나 생각 등 그 어떤 것도 단 한순간 머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걷고 있는 몸과 그 몸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느껴진다. 그 이후에는 걷고 있는 몸과 그것을 바라보는 무엇과, 허공에서 이 둘을 함께 바라보는 무엇이 느껴진다. 세 개의 물건(?)이 한 공간에 오롯이 존재하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이런 경험은 반나절동안 지속되었다. 아무것도 떠올릴 수도 없었고, 생각이나 감정도 느낄 수도 없었고, 마치 허공 속에 세 개의 존재 또는 물건만 남아있는 느낌이다. ‘나’라는 존재도 사라졌고, ‘나의 것’이라는 것도 따라서 사라졌다.
몸은 나의 몸이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과연 존재할까? 아니면 ‘나’라는 관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몸’이 ‘나’라고 의식하고 있지는 않을까? 몸이 하는 행동을 ‘나’가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몸은 그냥 몸이 할 일을 할 뿐이다. 피곤하며 쉬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몸의 활동을 알아차리고 바라보는 무엇이 있다. 바로 관찰자다. 귀는 듣고, 입은 맛을 보고, 눈은 사물을 본다. 마음 역시 감각기관이다. 마음은 생각과 느낌을 받아들이는 감각의 문일 뿐이다. 귀가 듣고, 눈이 보듯, 마음은 생각과 느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마음과 귀와 입과 눈은 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같은 감각기관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느끼고, 죽은 사람은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감각기관은 ‘나’가 아니다. 그냥 감각기관일 뿐이다. 나의 눈, 귀, 입, 코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나의 것’이 아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을 알아차리는 그 무엇이 있다. 관찰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불성, 본래면목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놈’이 느끼고 알아차리고 있다. ‘이 놈’을 찾는 것이 우리가 한평생 할 일이고, 이것이 바로 마음공부고 수행이다.
요즘 해파랑길을 격주 단위로 걷고 있다. 무박 2일간 걷는데 약 8시간 정도 걷는다. 오랜 기간 긴 길을 걸으며 우리는 ‘이 놈’을 찾는 작업을 수 있다. 어쩌면 ‘이 놈’을 찾기 위해 걷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과 생각과 감정의 주인인 이놈은 오직 ‘지금-여기’에서만 드러난다. 바로 ‘알아차림’을 통해서 드러난다. 걷는 동안 몸에 느끼는 감각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알아차리는 놈이 바로 ‘이 놈’이다. 발의 감각, 소리,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 순간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놈’이다. 이것을 하는 것이 바로 ‘마음 챙김’이다. 산만한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 지금 느끼는 감각과 감정, 생각을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 챙김’이 이루어진다. ‘이 놈’의 속성 중 하나는 존재의 실체가 없고 매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또한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으며 오직 ‘지금-여기’에서만 존재한다. 존재한다기보다는 늘 흘러간다. 따라서 실체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늘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이 놈을 만날 수 있다. 발의 감각, 생각이나 감정이 떠오를 때 그것들에 매몰되지 않고, 바라보면 된다. 알아차리는 그 순간 바로 이 놈이 나타난다. 바라보면 감각, 생각, 감정은 금방 생명을 잃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놈을 따라가 다시 알아차리는 마음 챙김을 하면 된다. ‘이 놈’은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 알아차리는 마음 챙김을 통해 나타났다 사라진다. 마치 예전에 있었던 두더지 잡기 놀이와 같다. 구멍에서 두더지가 나오면 때리고, 때리면 두더지는 사라지고 다른 두더지가 나타난다. 그렇다. 산만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 챙김을 하는 것은 두더지 잡기 놀이다. 따라서 두더지는 생각, 감정, 느낌, 감각 등이고, 이 놈을 때려잡는 주인이 바로 ‘그놈’이고, 이 놈은 알아차림이라는 마음 챙김을 통해서 나타난다. 두더지 덕분에 우리는 마음 챙김을 할 수 있고, 마음 챙김을 통해 자신의 ‘이 놈’을 만날 수 있다.
두더지 잡기 놀이를 하다 보면 ‘나’ 또는 ‘나의 것’의 의미가 사라진다. 하는 행동, 느끼는 감각과 감정은 있지만, 그놈의 실체는 없다. 실체가 있다면 행동, 감각, 감정은 상존해야 한다. 하지만 실체가 없기에 금방 나타났다 사라진다. 무아(無我)다. 무아를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잡으려 하고 애착을 하니 괴로움이 생긴다. 고(苦)다. 상존하는 것이 없으니 늘 변한다. 바로 무상(無常)이다. 산만한 생각, 잡고 싶거나 물리치고 싶은 감정, 하고 싶거나 하기 싫은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빨리 알아차리고 머물지 않는 것이다. 머물면 머물수록 괴로움은 커지고,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편안해진다. 알아차리면 몸과 행동과 감정을 자신으로부터 비동일시하게 된다.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괴로움이 발생한다. 몸과 행동과 감정은 그냥 뭔가를 하고 느낄 뿐이지. 이들이 바로 자신은 아니다. 이들과 자신과의 비동일시를 통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몸은 편안함을 추구하고 불편함을 싫어한다. 마음은 원하는 것만 추구하고 원치 않는 것을 멀리하려 한다. 생각이나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면 몸은 몸의 짓을 하고, 생각과 감정은 그들의 짓을 할 뿐이다. 그 일에 자신이 매몰되지 않고 알아차리면 이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다시 바로 알아차리면 이들은 또 금방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알아차림을 통한 마음 챙김의 빛이 이들이 설 땅을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괴로움 역시 저절로 사라진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 감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할 수 있다. 물리적인 거리가 있어서 굳이 집안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해도 소용없다. 오직 걷기에 집중하며 오롯이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바로 해파랑길을 걷는 일이다. 우리 모두 해파랑길을 걸으며 감정, 느낌, 감각,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이라는 두더지 잡이 놀이를 하면 좋겠다. 이들이 나타나면 알아차리면 된다. 그것 외에 달리 할 일도 없다. 길벗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 대화에 집중하면 된다. 이때 알아차림은 대화에 집중하느냐 아니면 대화를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느냐가 된다. 마음 챙김을 하기 위해서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면 감각의 위치는 변한다. 감각을 통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시작이다. 감각이 감정으로 변하기 전에 알아차리면 감정이 머물 자리가 사라진다.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은 대부분 과거나 미래 또는 망상이나 공상이기에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 더 이상 이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다. 과거의 일로 인해 괴롭거나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으로 괴로울 일이 저절로 사라진다. 우리는 해파랑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두더지 잡이 놀이를 한다. 또한 두더지를 잡으며 자신이라는 보물 찾기를 한다. 해파랑길은 즐거운 두더지 잡이 놀이고, 보물찾기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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