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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193] 삼법인 (三法印)

by 걷고 2021. 3. 23.

날짜와 거리: 20210322 7km  

코스: 봉산 – 불광동 – 불광천

평균 속도: 4km

누적거리: 3,484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주변에 걸을 길과 산이 많이 있어서 다행스럽고 고맙다. 상암동의 공원과 한강변으로 이어지는 한강공원, 불광천과 홍제천으로 이어지는 개천변 등. 일단 나가면 발길 닿는 대로 사방팔방 길은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든 갈 수 있다. 전에는 불광천에서 한강변으로 나가 광화문 청계천 입구까지 약 6시간에 걸쳐 걸었던 기억도 난다. 야간에 청계천에서 걷기 시작해서 합정역에서 마친 적도 두 번이나 있다. 길은 어디든 통한다. 집 바로 뒷산에 봉산이 있다. 봉산을 지나 앵봉산으로 갈 수도 있고, 이어서 구파발까지 갈 수도 있다.

 

 

 어제는 오랜만에 봉산에 올랐다. 평지만 걷다 산 길을 오르면 기분이 달라진다. 몸도 빨리 반응해서 땀을 쏟아내며 산길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그런 땀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 마치 모든 몸과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느낌이 든다. 봉산 입구에 벚꽃 터널을 기대하고 걸었는데, 보이지 않아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언젠가는 필 것이고, 그때 걸으며 벚꽃을 보면 되는데, 성급한 마음과 섣부른 기대감이 실망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결국 어리석음으로 인해 스스로 마음속에 ‘실망’을 담아두게 된 것이다. 이런 근거 없는 기대감과 희망이 불필요한 ‘실망’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고, 마음속에 숨어있다가 언제든 다시 올라와 일상을 방해할 수도 있다. 스스로 병을 만들고, 치료하기 위해 쓸데없는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치료가 되면 좋다고 웃기도 한다. 마치 맨 피부를 긁어 부스럼을 만든 후, 약을 발라 치료되었다고 웃으며 자랑하는 꼴이다. 긁지 않으면 부스럼이 생길 일 자체가 없는데도 말이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단어는 속담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공연히 건드려서 걱정을 일으킨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박완서 소설어 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개나리, 벚꽃, 홍매화, 진달래 등 꽃들이 환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피워내고 있다. 아마 자신들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름답다, 추하고, 보기 좋다, 보기 싫다고 판단 내리고 가까이하거나 멀리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은 서로 비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각자의 모습대로 살아갈 뿐이다. 진달래가 옆에 핀 다른 진달래를 보고 시샘하거나 자신이 더 아름답다고 뽐내지 않는다. 꽃은 꽃일 뿐이다. 짧은 시간에 피고 지고 사라지며, 다시 다음 해에 태어날 뿐이다.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갈 뿐이다. 유독 사람들만 서로 비교하고 비난하고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을 무시한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냥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면 안 될까? 개천가에 핀 꽃을 무시하지도 않고, 정상에 핀 꽃을 부러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 어떻게 살아가든 살다가 가는 것은 정한 이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마치 죽지 않고 평생 살아갈 사람처럼 돈, 명예, 부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숙명일까?

 

 

요즘 공부하고 있는 위파사나는 무아와 무상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무아는 ‘자기’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자기’는 생각, 감정, 경험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감정, 경험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느끼는 감정과 경험이 다르다는 것은 ‘자기’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들이 심층 의식에 숨어있다가 외부 자극을 받으면 튀어나와 장난질을 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장난질 치는 것을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더욱 견고하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감정과 생각이 들어야만 한다. 결국 ‘자기’라는 존재는 실체가 없는 생각, 감정, 경험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마치 홀로그램으로 만들어 낸 사람과 같다. 우리는 그 홀로그램을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그 자신에 속아 살고 있다. 허상에 속아서 실상인 ‘참 자기’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무상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의미다. 꽃이 피고 지듯이, 우리고 태어나고 늙어가며 죽는다. 세상 모든 존재는 이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생명을 지닌 유정, 무정은 반드시 죽거나 사라지게 되어있다. 심지어 바위도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사라진다. 무상은 절대로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인 관점이 아니다. 변화는 생동감 있는 삶을 뜻한다. 변화 속에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멈춰있다는 것은 죽었다는 의미다. 또한 생로병사 (生老病死) 나 성주괴공(成住壞空)은 자연의 섭리이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생로병사’는 한 사람의 인생으로 생각하면 변하는 과정이지만,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에 불과하다. 자연의 순환적이 과정에 따르는 것을 우리는 변화라고 생각하고, 그 변화에 역행하려고 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받기도 한다. 무지로 인한 욕심이다. 그 욕심이 고통을 만들어 낸다.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은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고, 존재의 실상은 무상이며, 이 진리를 모르기에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다. 셋은 연결되어 있다. 

 

 봉산에서 불광역 방향으로 내려왔다. 평상시와 다른 코스를 선택했다. 그냥 늘 가던 길이 아닌 샛길을 걷고 싶었다. 가끔은 이런 변화를 주며 생동감 있게 살고 싶다. 변화로 인해 위축되는 것이 아니고, 변화가 주는 역동성을 느끼며 살고 싶다. 삶 속의 변화를 기꺼이 맞이하며 무상의 이치를 서서히 체득해 나가고 싶다. 또한 이런 생각을 지닌 자신이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체득하며 살고 싶다. 그런 삶을 살면서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역시 희망이고 기대이고 어리석음이다.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모습대로 살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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