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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재심리상담센터

아프지만 건강한 친구

by 걷고 2023. 11. 15.

친구가 아프다. 구강암 초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위한 검사를 받고 있다. 검사를 받는데 만 며칠 걸린다. 수술을 위한 몸 상태 전반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특히 구강암의 경우에 입 안의 일부를 절개해서 수술을 해야 한다. 수술 이후 그 부위를 메꿀 가능성도 있다.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어 붙이는 수술을 위해 몸 전체를 촬영해서 암 전이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한다. 수술 받는 것 보다 수술 전 과정에서 환자와 가족들은 미리 지칠 수도 있다. 다른 친구 두 명이 동행해서 검사 받는 과정을 도와주고 있다. 나는 조금 늦게 도착해서 점심 식사를 하고 차를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식사하러 가는 길에 아픈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들의 소중함도 함께 느낀다. 친구들이나 모임을 많이 줄여 나가며 가능하면 조용하고 단순하게 지내려고 한다. 동시에 가까운 친구들과의 관계는 더욱 촘촘하게 다지며 지낸다. 가까운 친구의 암 소식에 본인도 놀랐겠지만, 우리 모두 놀랐다. 친구의 질병은 우리의 질병이 된다. 늘 그렇듯 우리는 아직도 만나면 웃고 떠들고 지낸다. 이런 모습이 친구의 수술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수술과 빠른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친구는 무척 담담하다.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고 자신의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얘기를 한다. 담담한 모습도 놀랍지만 병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아무런 실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자신이 병이 걸린 사람이 있고, ‘자신이 병이 되어버린 사람이 있다. 전자는 병과 자신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병은 자신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라 생각하고 병은 의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매일 주어진 일을 그냥 하는 사람이다. 반면 후자는 병에 매몰되어 자신 자체가 모두 병이라는 동일시로 인해 모든 기능과 생활이 멈추게 되면서 그 사람은 사라지고 오직 병만 남아있는 사람이다. 같은 병에 걸려도 병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대응하는 방법과 삶의 방식이 매우 달라진다. 이 친구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평상시 잘 키워 놓은 마음 근육의 힘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는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자신의 할 일을 한다. 말 없이 실천하는 사람이다. 통기타 모임을 결성해서 자선공연을 하기도 하고 수입금을 모아 사회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 친구다. 찬불가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사찰에 찬불가 보급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친구다. 노스님이 계신 사찰의 회계 업무를 자진해서 도와주고 초파일 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보시를 행하고 있는 친구다. 불교계의 유일한 오케스트라인 니르바나 오케스트라의 회계 업무와 회원 관리, 그리고 적극적인 홍보활동과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친구다. ‘무연고자 추모식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그 행사의 추모곡 합창을 위한 준비를 앞장 서서 하는 친구다. 은행에서 평생 근무하고 퇴직한 친구는 잠시도 휴식의 시간없이 자신이 할 일을 찾아내고 꾸준히 그 일에 매진하는 한결 같은 친구다. 그래서 이 친구가 무언가를 기획하고 있다고 하면 참석하는데 신중하게 결정하게 된다. 일단 시작한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친구이기에 그런 마음이 없고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이 친구를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이 친구는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작업하고,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물러난다.

 

차를 마시며 친구의 암 얘기보다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전쟁과 기후변화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우리가 만든 것이고,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나 있다는 얘기를 했다. 이미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다는 의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또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다. 그것도 괜찮다. 너무 많은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다시 우리의 욕심이 일어나 자신에게 또는 인간에게 유리한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우리가 저지른 모든 업보를 받아야 하는가? 공업(共業)중생이라고 하지만 우리 자식 세대는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한 업보를 받고 살아야만 한다. 뉴스에서는 아무 죄 없는, 군인도 아닌 민간인, 그것도 막 태어난 아이들이나 천진무구한 아이들이 전쟁 속에서 매일 죽어간다는 참담한 소식이 들린다.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기력으로 인해 스스로 지쳐간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친구의 암도, 전쟁도, 기후변화도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어제 한 친구의 말을 들으며 용기를 낸다. 그 친구는 최근에 발간된 나의 전자책 금융 문맹 탈출기를 보며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세상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부의 평가나 명예, 사회적 지위, 부귀 등을 얻기 위해 살아간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얻고 싶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과 시련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체념인지 포기인지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고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얻게 된다. 얻는 것이 아니고 얻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스스로 얻는 지혜가 아닌 상황과 경험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선물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억지로라도 선물이라는 단어를 쓰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싶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적극적인 태도인가 아니면 소극적인 태도인가? 긍정적인 태도인가 아니면 부정적인 태도인가? 이런 의문이 들면서도 굳이 이런 것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어떤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태도이고 삶이라면 이미 그 태도나 삶은 의미를 상실한다. 단어가 지닌 힘도 있지만, 단어로 인해 재단되어 원래 의미가 상실되는 단어의 한계도 갖고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찾아오는 단순함은 역설적이지만 우리를 평온하게 만들어준다. 선택의 여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욕심과 판단과 이기심이 발동하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선택과 결정권을 버리거나 빼앗기고 나면 삶의 주도권을 빼앗긴 슬픔과 무기력도 있겠지만, 동시에 찾아오는 자유와 해방감도 있다. 선택과 결정권은 결국 자신의 이기심에서 시작된다. 인간인 이상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주어진 환경과 상황으로 인해 저절로 이기심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큰 축복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주변 환경을 있는대로 받아들이면 온 세상이 나의 것이 된다. ‘라는 좁은 세상이 없어지면 우리라는 큰 세상이 우리 앞에 전개된다. ‘라는 의식의 집합체이고, 그 집합체의 목적은 오직 의 생존과 행복 밖에는 없다.

 

친구는 병은 의사에게 그리고 자신의 삶을 일상처럼살아갈 것이다. 암이라는 질병이 찾아온 것은 어쩌면 그에게 휴식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한 보이지 않는 힘의 사랑일 것이다. 그간 너무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번 기회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앞으로의 편안한 삶을 살아가라는 선물일 것이다. 그는 이런 운명 또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판단과 저항을 버리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가 그의 삶을 수용하는 것처럼 나 역시 다른 선택권이 없기에 걷고, 글 쓰고, 상담하며 살아갈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과 상황에 관한 선택권은 없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릴 수 있는 자신만의 선택권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선택권은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어떤 신조차도 감히 앗아갈 수 없다. 운명과 상황이 작은 나를 죽인다.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큰 나가 저절로 드러난다. 그래서 삶의 고통과 시련은 큰 나를 만나고 드러나게 하는 멋진 선물이다.

어제 차를 마신 커피숍 분위기가 무척 따뜻하고 정갈하다. 햇빛이 많이 들어와 실내는 따뜻하고, 테이블 배치나 꽃과 화분 등 소품들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다. 옆 음식점의 기와 지붕 모습도 정겹다. 그 분위기 속에서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우리 마음도 따뜻하고 정갈하고 정겨워진다. 추억을 공유하고 싶어서 사진도 찍었다. 완벽한 하루다. 이미 완벽한 우리들이다. 질병이 또는 상황과 운명이 아무리 우리를 흔들어도 우리는 늘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간다. 변하는 것은 겉 모습뿐이다. 나뭇잎이 무성하거나 떨어져도 나무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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