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가 거의 끝나갈 즈음 길동무들과 함께 한라산을 다녀왔다. 성판악에서 출발해서 관음사로 내려오는 코스로 10시간에 걸쳐 약 20km를 걸었다. 1월 31일에 제주도에 가서 제주 올레길 18코스를 걷고, 다음 날인 2월 1일 아침 6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내린 폭설 덕분에 멋진 설경을 감사하며 눈 세상을 다녀왔다. 공원 관계자가 길을 열기 위해 엄청난 수고를 했다. 그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루 전에 한라산 등산이 허락되어 미리 다녀 간 사람들이 길을 다져 놓은 덕분에 걷기가 아주 편안했다. 날씨도 매우 화창해서 백록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산이 허락해야 하고, 날씨가 받쳐줘야 하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산행은 삼박자가 아주 절묘하게 잘 맞은 멋진 산행이다.
함께 간 길동무들은 수개월 동안 함께 걸은 친구들이다. 그간 열심히 걸은 덕분에 모두 체력이 받쳐주었다. 혹시나 다른 길동무들에게 민폐가 될까 걱정이 되어 홀로 계단을 오르는 연습을 했다는 친구도 있다. 나 역시 불안한 마음에 북한산과 주변 길을 홀로 걸으며 체력 준비를 하고 갔다. 덕분에 정상에 오를 때까지 숨이 차오르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었다. 꾸준한 운동이 한라산 등정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라산을 35년 전쯤에 온 적이 있다. 회사 동료들과 왔었는데,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번 산행은 너무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만 가득하다. 준비가 되어 있기에 산행을 즐길 수 있었고, 설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었고, 여유롭게 웃고 떠들며 걸을 수 있었다.
일행의 후미에 서서 걸었다. 날이 채 밝기 전인 오전 6시에 성판악 입구에서 등록을 마친 후 걷기 시작했다. 어둠이 진하게 깔려있다. 헤드 랜턴을 착용하고 걸었다.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은 랜턴 불빛과 앞사람 발 뒤꿈치, 희미한 눈길 밖에 없다. 뒤에서 걸으며 화두를 들었다. 화두는 금방 끊긴다. 다시 들었다. 다시 사라진다. 또다시 든다. 이 과정을 반복해서 걸었다. 왼발 오른발은 자동적으로 반복해서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화두도 비록 들고 있지는 못했지만, 발의 움직임처럼 반복적으로 다시 들어본다. 화두가 생각날 때마다 들었다. 물론 화두는 금방 사라진다. 공부의 힘이 부족해서이다.
다른 길동무들에게 민폐를 끼칠 것 같아 회사 출근 시 계단을 걸어서 올라 다녔다고 한 친구의 얘기가 떠오른다. 오르막을 특히 힘들어했던 친구였는데, 스스로 노력해서 아주 편안하게 등정에 성공을 했다. 꾸준한 노력이 만들어 낸 멋진 성취다. 그간 화두를 들고 공부하면서 때로는 화두가 전혀 들리지 않아 좌절을 하기도 했었다. 때로는 잘 들려서 잘 된다는 생각에 우쭐하기도 했다. 모두 쓸데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되든 안 되든 꾸준히 정진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만약 그 친구가 힘들어서 참석하지 못했다면, 평생 한라산 등정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의 성공으로 그 친구는 다른 도전을 과감히 도전할 용기가 생겼을 것이다. 화두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화두가 들리지 않아도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화두와 나 자신이 하나가 될 날이 올 것이다.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공부법이자 삶의 지혜다.
수년 전에 조계 종단의 특별 수도원인 봉암사에서 운 좋게 철야 정진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방장 스님이셨던 적명 스님께서 법문을 들려주셨다. 지금 그 스님은 열반하셔서 만나 뵐 수 없다. 스님께 질문을 드렸다. “화두를 들려고 하는데 자꾸 망상만 올라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스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바닷가에 앉아 바닷물을 모두 퍼내겠다는 마음으로 표주박으로 반복해서 물을 퍼내면 됩니다.” 그 말씀의 뜻을 이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상시 꾸준한 산행이 한라산 등정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게 만들었듯이, 꾸준한 화두 수행만이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한라산 등정을 하며 다시 한번 체득할 수 있었다.
한라산은 말없는 가르침을 베풀어주었다.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귀한 가르침이다. 등산이든, 수행이든, 어떤 일이든 세상 살아가는 방법은 한 가지다. 꾸준히 정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좌절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성공 덕분에 우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좌절과 우쭐함에 멈추지 말고 다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삶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고통과 행복의 순간에 멈칫거리며 머무르게 되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작고 좁은 세상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통을 인내하고 행복감에 취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세계가 넓어져 확장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세상이지만 이미 다른 세상이 된 것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로 세상은 변화된다.
엄홍길 대장은 산에 오르면 반드시 정상석에 입맞춤을 하며 산에 계신 신께 감사를 드린다고 한다. 산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산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정상석에서 합장하며 절을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 합장을 정면을 바라보고 하지 못하고 옆으로 수줍게 합장을 했다. 정면에 합장 배례를 하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합장을 하며 한라산에 감사를 표하고 싶었고, 백록담의 신령한 기운에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비록 원하는 모습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충분히 한라산 산신령께 감사를 드렸다. 화창한 날씨와 멋진 설경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신 한라산 산신령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함께 걸은 길동무들이 모두 안전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령스러운 백록담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용기를 갖고 살아가라고 무언의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푸른 창공을 보여주시며 티 없이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안거가 끝나가는 시기에 한라산을 등정했고, 관음사로 내려와 사찰 경내를 둘러보았다. 일주문 양 옆에는 중생들의 발원을 담은 수많은 부처님들이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 뒤에 조성된 큰 부처님께 합장하며 삼배를 올렸다. 한발 한발 걸으며 한라산을 등정하듯 화두를 반복해서 들으며 깨달음의 길을 걷고 있다. 언제 깨달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화두를 들고 있으면 깨달은 부처요, 화두를 놓치면 미망 속에 헤매는 중생이다.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퍼내 듯 화두를 들고 또 들면 언젠가는 미망에서 벗어나 환한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한 발 한 발 걸으며 한라산 정상에 올라 청명한 하늘과 환한 백록담과 시원한 세상을 바라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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