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직하고 좋은 후배가 유명을 달리했다. 당뇨로 고생하다 암이 발생했고 패혈증이 왔다. 병마와 싸우다 삶을 마감했다. 늘 웃고 정이 많은 친구였다. 이제는 그 친구를 볼 수가 없다. 장례식장에 들어가서 바로 문상을 하지 못하고 주위를 서성거리며 마음속으로 광명진언을 염하며 그 친구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문상을 하고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예쁜 딸이 한 명 있다. 부인은 슬픔을 억제할 수가 없는지 연신 눈물을 흘린다. 그 옆에는 후배의 동생이 아들과 함께 서서 문상객을 맞이한다.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홀로 떠났다. 부모님 모두 생존해 계신다고 한다. 아들을 먼저 보낸 부모님 마음이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부모님과 아내, 어린 딸을 두고 떠나는 그 친구의 마음은 또 어떨까? 자신을 괴롭혔던 몸을 떠났으니 이제 몸 때문에 고통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친구 생각이 나며 자꾸 가슴이 먹먹하다.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친구였다. 만나면 반갑고 손이라도 잡아주며 나의 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친구였다. 살이 많이 쪄서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기도 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와 나눴던 카톡을 열어보았다. 작년 부처님 탄신일에 부처님의 가피로 건강회복을 기원한다고 톡을 보냈다.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빨리 회복해서 나타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하지만. 서로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은 회복이 불가능한 것을 잘 알면서도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 던진 비겁하지만 용감한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알면서도 마치 그 말을 믿듯이 서로 카톡을 나눴다. 최근에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는 얘기를 듣고 병문안을 가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방문을 거부하고 있다는 답변만 들었다. 자신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 것이다.
전철 안에서 그 친구에게 뭔가 할 말을 쓰고 싶었다. 페이스북에 슬픈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며 눈물이 난다. 눈물을 훔치며 짧은 글이지만 계속 썼다. 옆에 앉아있던 한 젊은 친구는 내 모습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는지 자리를 옮긴다. 그냥 눈물을 흘리며 글을 계속 썼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억지로 감정을 누르며 전철에서 내려서 걸었다. 감정은 계속해서 솟구쳐 올라온다. 그만큼 그 친구가 내게 큰 의미였고, 내 삶 속에 들어와 있었는지 전혀 몰랐었다. 하지만, 그만큼 큰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다만 미처 알지 못했을 뿐이다. 비록 자주 만나거나 소식을 전하지는 않은 친구였지만, 그 친구는 마음속에 늘 남아있던 친구였다. 떠나고 나니 그 친구가 더 그립다. 앞으로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지만 이런 감정과 슬픔을 느꼈던 친구는 거의 처음이다.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에 가장 큰 슬픔이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특별한 추억이 많이 쌓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늘 마음속에는 남아 있었던 친구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떠난 후 아쉬움만 표현하고 있다.
고인이 된 친구와 나쁜 감정이 없었다는 것은 무척 고마운 일이다. 만약 묵은 나쁜 감정이 남아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짐이다. 그 감정은 풀 수도 없고, 돌려줄 상대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과 감정을 교류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나쁜 감정은 숨기고 살거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사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과의 감정은 바로바로 정리하는 것도 살아가는 지혜다. 풀지 못하면 잊거나 아니면 흘려보내야만 한다. 갖고 있어 봤자 자신만 괴롭힐 뿐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감정도 감정이지만, 죽어가는 사람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나쁜 감정을 품는다면 그 나쁜 마음이 내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윤회를 믿는다면. 윤회를 믿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쁜 감정을 풀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감정을 그대로 안고 죽어야 한다. 풀어야 할 상대는 이미 영혼이 살고 있는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묵은 감정은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사전(死前) 장례식은 의미가 있는 행사가 될 수 있다. 죽기 전 묵은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풀고 가야 한다. 그것이 자신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친절이자 예의다. 감정을 풀어낸 후 홀가분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장례식은 삶을 끝내는 슬픈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장례식은 축하하는 즐거운 자리가 되어야 한다. 중년 이상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한평생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억지로 삶을 연장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예전에 읽었던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 나오는 모리 교수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 마지막 파티를 열며 죽음을 맞이한다. 사전 장례식을 멋지게 치른 것이다. 나 역시 사전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 그리고 죽은 후 장례식을 하지 않고 바로 화장을 해서 뿌리라고 부탁을 하고 싶다. 가끔 딸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갑자기 얘기하면 놀랄 것 같아 미리 조금씩 얘기를 하고 있다. 후배의 장례를 다녀오며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모든 감정을 털어버리고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편안하고 홀가분하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지만, 서서히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시점에 이 생각이 더욱 강하게 떠오른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묵은 감정이 남아있는 사람들 얼굴을 떠올려 본다. 아직도 세 명 정도가 남아있다. 그중 잊고 있던 얼굴도 있다. 이제 그 감정도 흘려보낼 때가 왔다. 좋은 마음으로 돌려서 그분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싶다. 갖고 있어서 득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좋은 것은 갖고 있으면 지키려 하고,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삶을 소모한다. 나쁜 것은 갖고 있으며 자신을 갉아먹는다. 버리면 사는데, 버리지 못해 죽는다. 결국 버리고 또 버리는 것만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한 친구가 자신을 찾는 일은 자신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씩 지워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내 생각, 내 물건, 내 가족, 내 감정, 내 재산, 내 명예 등 ‘나’라는 것이 붙어있는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힘들게 만들 뿐이다.
살기 위해서 버려야 한다.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에서 해방이 되어야 비로소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을 위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 불행하게 만든다. 아이러니다. 구하는 것을 버리면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쌓기보다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면 ‘참 나’가 저절로 드러난다. 우리가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은 ‘거짓 나’가 만들어 낸 환상을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안거를 하고 화두를 참구 하는 이유도 바로 이 환상에서 벗어나 실상을 보고 ‘참 나’를 찾기 위한 방편이다. 오늘이 설 명절 바로 다음 날이다. 이제 동안거는 이주일 남았다. 남은 기간 정신 차려 정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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