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는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거를 하면서도 뭔가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 모든 환경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안거를 하겠다는 것도 혼자 결정한 일이고, 안거 중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누구를 탓하거나 상황을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어느 날은 단 한 시간도 정진할 시간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안거를 한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낸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안거는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을 편안하고 단순하게 하며 한 공간에 머물며 집중 수행을 하는 것이다. 한 장소에 머물며 모든 책임과 의무, 할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화두에 집중해서 ‘참 나’를 찾는 기간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모습을 보면 안거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원래 계획도 일상생활 속 안거를 하는 것이었지만, 공부의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안거는 무의미하다.
하는 일이 제법 많다. 둘째 손주를 돌보기 위해 일주일에 사나흘은 딸네 머물며 기사 노릇을 하느라 하루에 두 번 이상 운전을 한다. 손주들을 돌보는 일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가끔 손이 필요하면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한다. 아내와 딸, 두 명의 손으로 두 아이를 돌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공무원 채용 면접 의뢰가 들어오면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챙겨 입고 면접장에 간다. 면접을 마친 후에는 집으로 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딸네로 간다. 2주에 1회 상담 전공 스터디 모임에 나간다. 모임에 나가기 위해 정해진 범위까지 사전에 읽고 공부해야 한다. 주 1회 마음복지관에서 개인 상담을 진행한다. 상담사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상담을 꾸준히 진행하는 것이 전문성을 키워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매주 경기둘레길을 진행하고 걷기를 마친 후에는 후기를 쓴다. 책을 발간하기 위해 글도 꾸준히 쓰고, 책도 읽고, 신문도 읽는다. 한 곳에 머물지도 못하고,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 화두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늘 뭔가 할 일이 있어서 몸과 마음이 바쁘다. 고요히 화두를 관할 물리적, 심리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스스로 만든 것이다. 스스로 옥죄는 사슬을 만들고, 그 사슬을 풀려고 애쓰느라 몸도 마음도 바쁘다.
며칠 전 책을 읽는데 한 문장이 가슴에 박힌다. “글을 모아 놓는다고 책이 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다. 책을 발간하고 싶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데, 어느 출판사의 에디터가 쓴 책에 나온 이 문장이 뒷머리를 강타한다. 글을 모으면 책이 되는 줄 알았다. 큰 착각이라는 사실을 이 문장을 통해서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 충격이 끊임없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왜 책을 발간하고 싶을까?” “왜 동안거를 하는가?” “왜 걷는가?” “왜 후기를 쓰고 길 안내자로 활동하고 있는가?” “왜 상담 공부를 계속해서 하고 있으며 상담도 진행하고 있는가?” “왜 면접관으로 활동하고 있는가?” 등등 수많은 질문이 올라온다. 질문 속에 매몰되어 있는 순간 이미 화두는 사라지고 공부는 멀어진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은 결국 두 가지, 돈과 명예로 귀결된다. 마음공부를 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 안에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명예욕이 도사리고 있다. 걷기, 책 발간, 상담도 돈과 명예와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민 낯을 마주하니 자신이 초라해진다. 뭔가 이루지 못한 결핍을 명예로 보상받고, 풍요롭지 못한 경제적 허기를 채우려는 이유 때문이다. 안거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안거’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모든 수행자분들에게 너무 송구스럽다.
채워지지 않는 심리적, 경제적, 환경적 요소들을 채우기 위해 평생 동안 수많은 일들을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다. 결국 결핍을 채우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세속 일은 채우는 일이고, 수행은 버리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은 수행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자신을 찾고 싶어서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해 놓고 정작 마음속에서는 세속적인 욕망만을 키우고 있었다. 허망하다. 며칠 전에는 지인인 작가에게 ‘경기 둘레길’ 후기에 대한 피드백을 부탁했다. 그 작가는 그간 썼던 약 30여 편의 글을 모두 읽은 후 ‘걷고님이 그냥 취미로 글을 쓴다면 코멘트를 안 할 텐데 작가가 되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픈 피드백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친절한 답변을 보내주었다. 다음 주에 만나기로했다. 이 문자를 본 순간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한 때는 ‘상담심리사’였다. 지금도 상담사로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전문 센터에서 상담을 하고 있지는 않다. 상담 봉사 활동만을 하고 있다. 상담사로 채용하는 센터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를 떠나서 그것이 현실이다. ‘걷기 여행 전문 작가’도 하나의 정체성이다. 근데 과연 나는 정말 ‘걷기 여행 전문가’이고 ‘여행 작가’가 맞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 답은 ‘아니다’로 돌아온다. ‘걷기 전문가’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기에는 길과 걷기에 대한 전문성이 턱없이 부족하다. ‘작가’라고 말하고 싶지만 ‘작가’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단지 반기획 출판으로 산티아고 여행기를 한 권 발간했을 뿐이다. ‘수행자’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다른 수행자들에게 송구스럽다. ‘심신 힐링 컨설턴트’라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그 일을 하기에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간 추구했던 자신의 정체성이 모두 사라졌다. 그냥 상담을 전공한 사람으로 상담 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걷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마음의 평온을 위해 명상을 가끔 하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화도 많이 내고 마음은 늘 풍랑 속에서 헤매고 있다. 다시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찾기 위해 수행을 하는데 수행은 진척이 없고 여전히 미망 속에서 헤매고 있다. 수행을 한다는 ‘말 빚’만 지고 있고, 수행과는 거리가 먼 짓만 일삼고 있다.
지인이 이틀 전에 책 한 권을 추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 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저)’. 20대 중반에 다국적 기업의 재무 담당 중역으로 근무하다 삶의 허기를 느껴 단 5초의 결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태국의 명상센터에서 17년간 수행을 한 후 중생 교화를 위해 가르침을 펴는 수행자의 얘기다. 저자인 수행자는 나중에 루게릭병에 걸려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아직 완독을 하지 못하고 아껴서 매일 조금씩 읽고 있다. 책의 초반부에 기자와의 인터뷰 얘기가 나온다. 기자는 “무엇을 배웠습니까?”라는 질문을 한다.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본문 중에서) 이 답변에 모든 진리가 담겨있다. 자신의 생각은 생각일 뿐, 결코 자신이 아니다.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이고 명상이고 마음공부이다.
이 책이 시기적절하게 다가왔다. 동안거를 하면서 버리지는 못하고 오히려 욕심을 채워나가고 있는 60대 중반의 자신과 모든 것을 버리고 수행자의 삶을 살아온 30대 저자인 수행자의 삶을 비교하며 이 책을 읽고 있다. 아직도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60대 중반인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과연 명예나 경제적인 부의 축적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삶의 방편이나 수단은 될 수 있을 망정,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삶의 과정에 필요한 동력과 자원이 될 수는 있어도 삶의 목적은 아니다. 다시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를 한 마디도 정의할 수 있는 정체성은 무엇인가?’ 자신을 찾는 일이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이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알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면서 어떤 일을 한다면 그는 이미 주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종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부귀의 종, 명예의 종, 권력의 종, 쾌락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수행은 자신을 찾는 일이다. 종의 삶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방편이다.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참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다. 그간 마음공부를 하고, 수많은 상황들을 겪고, 최근에는 동안거를 하며 자유인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며 끊임없는 노력을 해 왔지만 실은 헛일만 하고 있었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아무 목적 없이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참 공부다.’ 돌이켜보니 지난 60년 이상의 세월은 늘 목적을 추구하는 일만 해 왔다. 비우는 일이 아닌 채우는 일만 해왔다. 채움은 욕심이고 탐욕이다. 탐욕의 근본 뿌리는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으로 인해 욕심이 생기고, 욕심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며 업을 쌓는다. 그 업은 다른 어리석음과 탐욕을 불러온다. 마치 시시포스의 바위와 같다. 평생 끝나지 않는 고통의 연속과 반복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혼란스럽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편안하다. 가식을 벗어버린 개운함이다. 혼란은 평온을 위한 과정이다. 어제 상담 봉사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머릿속에는 온갖 질문으로 가득하지만 마음은 가볍다. 일단 남은 동안거 기간 동안 의무적으로 하는 일들을 하지 않기로 했다. 걷기 후기 쓰기와 글쓰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모두 책 발간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이다. 목적이 있는 활동이다. 쓰고 싶을 때는 쓰지만, 쓰기 싫을 때 쓰지 않기로 했다. 걸으며 사진 찍거나 무슨 글을 쓸까 생각하지 말고 길과 걷기를 즐기자. 전자책 두 권을 발간 준비 중인데 편집을 위해 애쓰고 있는 분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보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체성 찾는 작업을 멈추고 매 순간 하는 일에 집중해 보자. 지금은 하는 일과 일을 하는 사람이 분리되어 있다. 이 둘이 하나가 되도록 알아차리고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목적 없이 꾸준히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명상, 걷기, 독서와 글쓰기다. 이 넷은 평생 친구이자 동반자이다. 같은 일이지만 예전에는 목적을 갖고 했는데, 이제는 그냥 즐기듯 하고 싶다. 싫으면 하지 말고 하고 싶을 때 하자. 명상은 수행자 코스프레에서 벗어나 순수한 수행을 하자. 책 발간과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을 버리고 그냥 풍경을 감상하며 걷기를 즐기자. 어떤 목적을 갖고 독서를 하지 말고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읽자. 글쓰기 역시 책 발간을 목적으로 하거나 작가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고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을 때 편하게 쓰자. 글로 정리하니 마음이 한결 개운하고 편안하다. 언젠가 이런 생각들이 변화되면 또 그때 변화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자. 목적이 없는 삶은 정체성이 없는 삶이고, 정체성이 없는 삶은 자신을 죽이는 삶이고, 자신을 죽이는 삶이 자신을 살리고 참 자기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안거 기간 동안 비록 수행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생각에 도달할 것을 보니 결코 헛일은 아니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또한 좋은 일이다. 자신을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것보다 스스로 아끼고 존중하고 보살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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