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손자인 보현이를 복지관에 데려다주는 날이다. 복지관 놀이치료에 등록하기 위해 수개월 전에 신청을 했고, 이제야 자리가 나서 처음 참석하는 날이다. 소연이와 보현이가 뒷좌석에 타고 나는 운전을 한다. 소연이는 보현이가 지루하지 않도록 아이 장난감 중 하나인 음악 버스를 틀어주며 아이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차에만 타면 보현이는 음악 버스를 틀어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디에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른 채 엄마 손에 끌려 여기저기 다니며 놀이치료, 언어치료, 물리치료, 통합감각치료 등을 받는다. 다행스러운 점은 요즘에는 치료 시간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과 서너 달 전만 해도 차에 타는 것조차 울며불며 거부했던 아이다. 치료 시간인 약 한 시간 동안 복지관 앞에서 주차를 하며 기다린다. 보현이 덕분에 가정의 행복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고마운 일이다.
차 안에서 기다리며 송담 스님의 법문을 듣는다. 송담 스님 법문 중 ‘생활 속의 참선법’이라는 항목으로 분류해 놓은 법문들이 있다. 요즘은 그 법문을 주로 듣는다. 송담 스님과 전강 선사의 법문을 매일 하나씩 듣는다 해도 전체 법문을 모두 듣는 데는 약 3년 정도 걸릴 것 같다. 1,000여 개의 법문이 녹음되어 있다. 휴대전화에 법문을 넣어 다니며 언제든 필요할 때 듣는다. 용화선원에서 두 선사의 법문을 녹음해서 sd 카드로 변환하여 신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전강 선사의 법문은 선명하게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 톤이나 발음, 녹음 환경 등이 좋지 않아 알아듣기 어려운 편이지만, 송담 스님의 법문은 매우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 법문을 들으며 세월을 초월해 두 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불교 공부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혼자 10년 공부하는 것보다, 10년간 스승을 찾아 헤매는 것이 공부에 더 도움이 된다.”라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있다.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지만 법문을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부처님께서는 ‘자등명법등명 (自燈明法燈明)’을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비록 두 선사를 지금 뵐 수는 없지만, 그분들의 말씀이 진리의 등불이 되어 나의 길을 밝혀주고 있다. 이 등불에 의지해서 어둠 속에 갇혀있는 자신의 등불을 찾고 있다. 죽을 때까지 두 선사의 법문을 들으며 공부를 이어가면 된다. 방향을 잃고 헤맬 때 의지할 곳이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요즘에는 명상이나 마음공부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공부법들이 넘쳐나고 있다. 어떤 명상법은 명상의 기본보다는 기법이나 기술에 치우치며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리를 모른 채 기술만 배우게 되면 반드시 한계에 부딪치게 되며 더 이상 공부의 진전을 이루기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두 선사의 법문은 기초를 단단하게 다질 수 있고, 나아가 깨달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반석 같은 공부법이다. 이제는 다른 공부법을 따를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두 스승의 법문을 듣고 따르며 수행하면 된다.
오늘 들은 법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한 가지는 정법에 의지해서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화두 공부를 하다 보면 회의가 오기도 하고 공부 진전이 없다는 생각이 들며 퇴굴심이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꾸준히 공부를 이어가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요즘 화두가 잘 들리지 않아 공부가 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늘 법문을 듣고 다시 마음을 바로 잡는다. 올바른 방법으로 꾸준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공부법은 없는 것 같다. 올바른 방법은 두 선사의 법문에 모두 들어있다. 두 선사는 같은 진리를 다양하게 말씀하신다. 두 선사의 법문을 들으며 같은 진리를 다른 표현으로 반복해서 가르침을 펴시니 얼마나 지루하고 피곤하실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중생들이 이해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많이 송구스럽다. 익지 않은 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작업 밖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말씀하시는 분도 답답하겠지만, 듣는 중생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탐심과 애욕을 멀리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다. 탐욕은 몸을 지닌 중생들이 생존을 위해 갖고 태어난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욕심이다. 몸을 지녔으니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을 것이 필요하고, 입을 것이 필요하고, 잠 잘 곳이 필요하다. 기본적인 욕구 충족만으로 만족하게 된다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옷, 더 편안한 잠자리를 추구하며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이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이왕 벌 바에는 남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한다. 남과 비교하고 시기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생존에서 투쟁으로 삶의 모습이 변화된다. 삶은 전쟁터가 되고, 동료나 주변 사람들은 적이 되거나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몸의 생존이라는 본질적인 중요성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정글 같은 전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혹사시키고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며칠 전 한 유명 작가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난다. 출판사에서 억 단위의 원고료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비루하게 살지 않을 정도의 돈은 있으니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기사를 읽으며 크게 공감했다.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면 더 이상 탐욕을 부릴 필요는 없다.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될 수도 있다. 욕심이 주인이 되고, 자신은 욕심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구를 경계하라고 강조하신다. 스님께서는 사람의 얼굴 가죽 한 껍질만 벗겨도 시뻘건 모습만 보일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무리 예쁘고 멋있어도 속에는 온갖 오물과 똥으로 가득하다고도 말씀하신다. 이성에 대한 끌림은 인간으로서 또 동물로서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겠지만, 그 끌림에 끌려 다니지 않고 오히려 공부의 방편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 되는 순간이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울고 웃으며 보냈다. 이성들이 함께 있는 모임들이 대부분이었다. 마음공부가 깊은 한 친구를 만날 때 이성인 지인들과 함께 나간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 친구는 내가 이성을 데리고 나온 것이 매우 놀라웠다고 얘기하며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제야 그 친구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굳이 이성을 만날 이유와 필요도 없다. 동호회 모임이나 오랜 인연들을 만날 때의 이성은 이미 이성이 아닌 그냥 친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성은 이성이니 이성을 대할 때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탐욕과 애욕을 멀리하라는 말씀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편이고 동시에 수행에 장애가 될 요소이기 때문이다. 탐욕과 애욕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을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드라마나 영화의 주제도 이 두 가지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바로 우리들 삶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행은 이 두 가지로 인해 만들어진 전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이다.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열심히 살지만, 동시에 이 두 가지를 얻는 과정에서 고통을 받게 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삶의 아이러니다. 애욕과 탐욕의 늪에 빠져 고통 속에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느냐는 오직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달려있다. 동안거는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기 위한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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