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와 거리: 20210604 - 20210605 24km
코스: 서울 둘레길 (빨래골에서 구기공까지) 외
평균 속도: 3.4km
누적거리: 4,094 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걷기 동호회에서 길 안내자로 참석자들과 함께 서울 둘레길을 걷고 있다. 이번 길이 3회 차로 빨래골에서 구기동까지 세 분의 참석자와 함께 걸었다. 화창한 날씨와 나무 그늘, 그리고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 덕분에 상쾌하게 걸을 수 있었다. 중간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데 먼저 쉬고 계시던 등산객 한 분이 (이하 '등'이라고 칭함) 내게 (이하 '걷'이라고 칭함) 말을 걸어오셨다.
등: 전생에 무슨 덕을 지으셨길래 미녀 세 분과 함께 걸으시는 행운을 누리시나요?
걷: 아, 네, (잠시 머뭇거림) 근데 덕인지 업인지 잘 모르겠어요.
등: 덕이지요.
걷: 선생님도 전생에 덕을 많이 쌓으셨네요. 홀가분하게 혼자 걸으시는 것을 보니
등: 업이지요. 홀로 외롭게 걷고 있으니
서로에게는 덕이라 하고, 자신들은 업이라 한다. 단순한 배려와 겸손일까? 걷기 동호회에서 길 안내를 하고 있고, 평상시처럼 참석자들과 함께 걷고 있을 뿐이다. 그런 모습이 그분의 눈에는 좋게 보였나 보다. 어쩌면 그분 마음이 덕으로 가득해서 우리의 모습이 좋게 보였을 수도 있고, 홀로 걷기가 심심해서일 수도 있다. 덕분에 서로 덕담을 나누고 잠시 같이 걷기도 했다. 과연 덕과 업의 차이가 무엇일까? 어떤 언행은 덕이 되고, 어떤 언행을 업이 될까? 내린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즐기면 덕이고, 마지못해하면 업이 된다. 함께 웃고 떠들고 걸으면 덕이고, 걸으며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불만, 불평이 있으면 업이 된다. 길 안내자가 안내한다는 것을 내세우면 업이 되고, 참석자들 덕분에 걸을 수 있다는 고마운 생각을 갖게 된다면 덕이 된다.
같은 상황도 바라보는 마음가짐의 차이로 인해 업과 덕으로 나눠진다. 주어진 상황은 과거 업의 결과임에는 틀림없다. 과거의 축적된 삼업(三業)인 신구의 (身口意)의 결과로 지금의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업이 우리의 삶을 운명처럼 평생 끌고 나가지는 못한다. 지금-여기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업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 수도 있고, 업의 방향을 바꾸며 살아갈 수도 있다. 업으로 인한 업보는 받게 되지만, 그 업에 평생 끌려 다닐지 말지는 자신의 결정에 달려있다. 살아온 습관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어제의 행동을 반복하면서 내일의 삶이 달라지길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업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지만, 업에 끌려 다니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는 있다. 지금-여기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바른 눈으로 보고, 이전과 다른 바른 결정을 내림으로써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거대한 강물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지금 사는 모습이 싫으면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면 된다.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 예전에 스님께 들었던 말씀이 기억난다.
“한 청년이 스님이 되고자 절을 찾았다. 그 청년의 얼굴을 보니 오래 살 것 같지 않아서 스님은 청년에게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오라고 했다. 부모님을 뵙고 돌아왔는데, 얼굴에 큰 변화가 생겨서 스님께서 물어보셨다. “다녀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청년이 대답했다. “흘러가는 냇물에 개미집이 떠내려가서 개미들이 죽을 것 같아 그 개미집을 들어서 땅에 올려놓았습니다.”
청년은 과거 업으로 인해 짧은 생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 개미를 구한 선업 덕분에 삶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예정된 삶을 조금 더 연장해서 수행에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이 청년이 개미집이 떠내려 가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스님이 집에 다녀오라는 말씀에 화가 나서 씩씩대고 걷다가 길바닥의 돌을 차서 개미집이 부서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 순간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간다. 선인선과(善因善果)이며 악인악과(惡因惡果)이다. 선한 일을 쌓으면 선한 결과가 나온다는 말이다. 매 순간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고, 지금처럼 지낼 수도 있고, 지금보다 더 악화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미래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지금’이라는 순간이다. 당장 일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먼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 또는 과거 일을 후회하며 살아간다. 과거의 총결산이 지금이다. 지금의 삶이 미래를 결정한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 꾸준히 하는 공부가 참 공부라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공부가 아닌, 단지 이 순간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참 공부라고. 걸을 때는 걷는 것에 집중하고, 먹을 때는 먹는 일에 집중하고, 대화 나눌 때는 대화에 집중하는 삶이 최선의 삶이다. 걸으며 일 걱정하고, 먹으며 걸을 생각하고, 대화 나누며 먹는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치 국어 시간에 수학 공부하고, 수학 시간에 영어 공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치는 단순한데 실천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꾸준한 연습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지금-여기에서 하는 나의 행동, 생각, 말, 의도가 과연 나와 다른 존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오직 이 질문 하나만 지니고 다니며, 매 순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고, 그 판단에 따른 결정을 내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업인가? 덕인가?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선업도 그저 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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