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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07] 영화 ‘다크 워터스 (Dark Waters)’

by 걷고 2021. 4. 19.

날짜와 거리: n/a  

코스: n/a

평균 속도: n/a

누적거리: 3,689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대형 로펌 회사의 변호사 롭 빌럿(Rob Bilott)와 세계 최대 화학 기업인 듀폰과의 법정 소송 실화를 다룬 영화 ‘다크 워터스’를 시청했다. 할머니가 살고 계시고 롭이 어릴 적 뛰어놀았던 웨스트 버지니아 목장에서 젖소 190마리가 떼죽음을 당하게 된다. 젖소가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고 의문의 증상이 계속 발생한다. 주민들은 중증에 시달리고 있다. 할머니 소개로 찾아온 목장주를 만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롭은 듀폰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 자료를 조사하던 중 PFOA라는 알려지지 않은 독성 폐기 물질이 사람과 동물들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 만 명 사람들의 혈액 검사를 하기도 한다. 혈액 검사 몇 년 후 그 물질이 치명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듀폰은 수많은 소송을 제기하며 롭과 롭의 로펌을 괴롭힌다. 20년 간의 소송에서 듀폰은 약 8,000억 원에 달하는 보상금을 지급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의 관심사는 환경 문제보다는 대표변호사와 파트너이자 동료들, 주변 이웃들과의 갈등을 겪어내며 오로지 진실을 찾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변호사 롭의 삶이었다. 대형 로펌의 파트너로서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현장을 목격하면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간다. 아이들에게는 일 밖에 모르는 아빠, 아내에게는 신경 조차 쓰지도 못하고 가정사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도 못한 가장이자 남편, 로펌에서는 급여 감봉조치까지 당하고, 심한 스트레스로 손과 팔을 떨게 된다. 심지어는 기절을 하기도 한다. 기간이 길어지면서 주변의 지지와 격려도 비난으로 바뀌기도 하고, 진실이 확인되었음에도 대기업의 끊임없는 진실 왜곡과 소송전으로 지쳐가기도 한다. 

 

그는 편한 길을 갈 수 있는 방법도 알았을 것이다. 그 길은 그에게 돈과 명예, 그리고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진실에 매달렸다. 힘들고 외로운 길을 택했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걸었다. 대기업이 갖고 있는 재력과 로비력은 정부의 기준을 바꿀 수 있도록 만들 힘도 갖고 있고, 많은 사실을 은폐할 힘도 갖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롭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끝까지 진실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많은 생활용품 속에 PFOA는 사용되었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암과 중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진실을 눈 감을 수 없었던 롭은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진실을 밝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매달렸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2013년부터 PFOS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 희생이 인류와 동물, 자연을 구한 것이다. 

 

그에게 진실은 무엇일까? 왜 그는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진실에 목숨을 걸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양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양심’은 스스로 떳떳함이다. ‘양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가치를 분별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얘기하는 정치인이나 표리 부동한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자신에게는 관용적이고 타인에게는 엄격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기준이 될 수 없다. 기준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양심은 정의라고도 할 수 있다. 양심 있는 사람들이 기준을 엄격하게 정하고 실천하면 정의사회가 된다. 자신에게 득이 되느냐 실이 되느냐가 유일한 판단 기준이고 양심인 사람들은 이미 사람이기를 거부하거나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신의 안위가 양심과 정의의 기준이 된다. 그들만이 갖고 있고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선택적, 권위적, 특권적 양심이고 정의이고 기준이다. 그들은 불량한 양심을 갖고 있고, 불공정한 정의를 갖고 있으며, 기준 없는 기준만이 있을 뿐이다. 

 

과연 나라면 롭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양심과 정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그 삶의 무게를 견뎌낼 힘이 없고, 그런 힘든 삶을 살고 싶지도 않다. 생각의 크기가 사람의 크기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최소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의 그릇 크기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혹시 좀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을 위한 기도를 하며 서서히 자신의 그릇을 키워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걷고의 걷기 학교’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심신이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런 일을 하면서 자신의 크기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발원한다.  

상생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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