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한 사문에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는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예, 밥 한 끼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도 도를 모르는구나.” 세 번째로 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예, 숨 한 번 쉬는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장하다, 그대는 도를 바로 알았구나.”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영화 ‘숨’은 부처님께서 제자와 나눈 대화를 연상시킨다. 영화는 흔들리는 바다 물결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서 불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두 장면 위에 들숨과 날숨소리가 얹힌다. 물결의 움직임이 들숨이 되고, 불의 움직임이 날숨이 된다. 이 장면을 통해 이 영화는 전달하고 싶은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흔들리는 바다 물결은 삶의 흔들림을 표현하고 있다. 때로는 평온하고, 때로는 엄청난 풍파가 밀려온다. 바다 위 하늘에는 천둥과 번개가 내려치거나 밝은 태양과 무심한 구름이 떠돌아다닌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다. 고기가 많이 잡히면 웃고, 성난 파도가 덮치면 겁에 질려 허둥지둥한다. 바다 물결은 늘 흔들리고 거품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바다 심연은 늘 고요하다. 우리네 삶은 겉으로 보이는 물거품을 따라가느라 심연의 고요함은 잊고 산다. 바다는 파도의 물거품이 아니다. 바다는 파도와 고요한 심연을 함께 지닌 하나다. 파도는 현상이고, 심연은 본성이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욕망의 불이고 노여움의 불이다. 불의 원동력은 어리석음이다. 이 불은 우리네 인생을 모두 태워버린다. 권력에 대한 욕망, 사랑에 대한 욕망, 부귀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이 우리네 삶을 모두 태워 재로 만들어버린다. 불교에서는 삶을 화택(火宅)이라고 표현한다. 집이 활활 불타고 있는데 불을 끄려 하지 않고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하거나 불나방이 되어 불속으로 뛰어든다. 동시에 불은 우리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준다. 우리 몸은 죽은 후 땅, 물, 열기, 바람으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아무것도 아닌 몸뚱이를 위해 평생 노예 노릇을 하며 살아간다. 불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살아서는 욕망의 화신이요, 죽어서는 한 줌 재라는 우리의 실상을 보여준다.
영화 ‘숨’은 대한민국 전통장례 명장 1호 유재철의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을 만든 영화다. 그는 전직 대통령, 큰 스님, 재벌 회장, 사회유명인사 등 수많은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른 사람이다. 그는 6, 000여구 이상의 시신을 닦고 정성스럽게 보내드린 대한민국 최고 염장이다. 그가 전하는 삶 이후의 삶에 관한 책, ‘대통령의 염장이’가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우연히 장모님 손에 들려있는 이 책을 본 적도 있다. ‘숨’은 그의 삶을 2년 이상 촬영하여 편집해서 만든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마음 한편이 무겁다. 다른 한편도 역시 무겁다. 한쪽은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무겁고, 다른 한쪽은 삶에 대한 번민으로 무겁다. 죽음 직전 사경을 헤매고 있는 장면,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과 시신을 닦는 과정, 화장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전직 대통령, 큰 스님, 보통 사람, 비참한 고독사를 맞은 사람의 마지막 여정도 보여준다. 살아서 어떤 삶을 살았든 죽어서 갈 곳은 한 평 남짓한 무덤이나 한 줌 재로 돌아간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느 누구도 또 어떤 존재도 이 존재의 실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죽음은 평등하다.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인생 후르츠’라는 일본 영화로 노부부의 아름다운 자연주의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구성한 영화다. 2년간 40분 분량의 테이프를 400여 개나 사용해서 촬영하고 편집하여 제작한 영화다. 이 영화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잘 그려낸 영화다. 이 부부가 정한 삶의 원칙이 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살아가는 신체적, 정신적 자립의 원칙. 자식들이나 주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자립의 원칙,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몸과 머리를 움직이는 활동의 원칙, 신선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자연주의 섭생의 원칙, 자신만의 삶의 원칙을 지키지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상호존중 및 자율의 원칙, 이런 원칙을 깨지 않고 지키며 살아가는 고집스럽지만 유연한 삶의 원칙이 있다. 남편이 세상을 먼저 떠난 후 아내는 ‘외롭다기보다는 덧없다.’라고 말한다. 외로운 것은 후르츠의 맛이고, 덧없는 것은 물의 맛이다.
덧없다는 말이 마음에 깊게 와닿는다. 최근에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을 다시 읽고 있다. 성우(惺牛) 경허선사의 족적을 쫓아다니고 싶어서이다. ‘심우도(尋牛圖)’라는 불화(佛畵)는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아 떠나는 그림이다. 목동은 몸이고 소는 불성(佛性)이다. 우리는 존재의 실상인 본성을 잃고 살아간다. 나는 목동이 되고 경허는 성우(惺牛), 즉 깨달은 소가 된다. 깨달은 소를 찾고, 그 소 등위에서 피리를 불고 한가롭게 살고 싶다. 소설에 나오는 경허 선사의 참선곡 한 구절이 떠오른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 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쏘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 끝의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소설 ‘길 없는 길’ 본문 중)
영화 ‘숨’은 바다 물결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을 보여주며 우리네 인생이 풀 끝의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슬은 해가 떠오르는 순간 사라지고, 등불은 바람 부는 순간 속절없이 꺼져버린다. 들숨 후 날숨하지 못하면 죽음이요, 날숨 후 들숨하지 못하면 죽음이다. 삶과 죽음의 순간은 한 숨, 한 찰나에 결정된다.
영화 마친 후 ‘아침마당’ 작가인 남희령이 유재철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염장이가 된 사연, 지금의 전통장례명장이 되기까지의 고된 과정,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의 모습, 편하게 숨을 거두는 사람과 끝까지 움켜쥐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등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그의 말 중에 현재 우리나라의 장례문화에 관한 얘기는 우리 모두 관심 갖고 들어야 할 부분이다. 문상이 하나의 사회적 관례나 인사치레로 끝나는 것이 아쉽다고 한다. 장례식을 치르며 고인의 삶을 추억하는, 고인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장례문화가 조성되길 바란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또한 죽기 전 보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 사전 이별식을 치르는 것도 멋진 제안이다. 장례식은 울거나 슬픔을 표현하는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남의 장례식 운운할 때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다.
영화 ‘숨’은 베를린 국제 영화제 출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년 상반기 중으로 국내에서 상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무겁고 묵직한 주제지만 언젠가는 모두에게 다가올 우리 미래의 모습이다. “죽음은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하는 것은 삶을 충실하게 만들어준다.”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유재철의 부인인 이종림의 지혜와 성찰이 담긴 얘기를 듣는 것도 이 영화를 봐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로 오랜 기간 고민과 성찰을 통해 얻은 깊은 얘기를 가볍고 편안하게 던지는 그녀의 지혜를 듣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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