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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인생 3막

실존주의란 무엇일까?

by 걷고 2023. 8. 18.

 실존주의(existentialism)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늘 있었다. 실존 또는 실존주의라는 말을 자주 책에서 읽거나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최근에 얄롬의 책을 읽으며 더욱 궁금해졌다. 지금 책상 위에는 얼마 전에 구입한 어빈 얄롬의 책 <실존주의 심리치료>가 놓여있다. 이 책은 네 개의 큰 목차로 분류되어 실존적인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심리치료 기법을 설명해 놓은 책인 것 같다. 인간 고통의 근원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네 가지가 바로 죽음(death), 자유(freedom), 소외(isolation), 무의미(meaninglessness)다. 이 네 가지가 실존인가? 아직도 실존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인간이 가진 특성을 실존이라고 하는지, 그 특성 때문에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실존이라고 하는지. 인터넷을 통해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검색해 봤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위키백과 한국)   

  

“실존주의는 개인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문예사조이다. 근대의 기계문명과 메커니즘적 조직 속에서 인간이 개성을 잃고 평균화, 기계화, 집단화되는 소외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실존의 구조를 인식, 해명하려고 하는 철학사상과 문예사조가 싹텄다. 즉 개인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문예사조.”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실존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 상호의존성, 인간의 삶과 죽음, 불확실성 등을 강조하며, 인간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또한 인간의 존재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선택과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삶은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네이버 검색 자료)     

 

 검색한 자료를 읽어보니 실존이란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감이 온다. 예전에 읽었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온 빅터 프랭클 박사의 자서전적인 수기다. 똑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사람에 따라 상황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 희망을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추구하는 동물적 본능만 갖게 되는 사람도 있고, 빅터 프랭클 박사처럼 그 안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자살하려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다. 결국 실존은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삶의 방편이다. 그 모든 것을 오직 자신의 주인만이 할 수 있고, 자신의 주인으로, 주인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자유와 책임,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인간은 고민하고 고통받는다.   

  

 얄롬의 네 가지, 즉 죽음, 자유, 소외, 무의미를 하나씩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죽음은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을까? 위험한 얘기다. 물론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도 있지만, 선택대로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존엄사의 경우에도 신청자의 심리적 상태가 우울이거나 환각 상태에 있다면 존엄사를 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신청자의 정신이 건강한 상태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고, 이런 선택을 존중해서 존엄사를 허락한다. 또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삶을 선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삶이 있어야 죽음이 성립된다. 태어남을 본인 의지로 선택할 수 있을까? 부모 사랑의 결과로 우리는 태어난다. 과연 태어남은 우리의 의지이고 선택인가? 불교에서는 ‘업(業)’의 결과로 생(生)을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자신이 받은 삶은 자신이 선택한 삶이 된다. 불교 외의 종교에서는 어떻게 태어남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삶이 선택이라면 죽음 역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삶과 죽음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고 죽음을 생각하며 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이 동전을 잘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죽음은 삶을 잘 살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 누구를 미워하거나, 재물에 욕심을 내거나, 세상을 비난하기보다는 사랑과 비움, 그리고 고마움으로 마음은 가득할 것이다.      

 

 자유, 요즘 내가 들고 다니는 화두다. 길을 걸으며 왜 걷는가에 대한 고민을 꾸준히 오랜 기간 해왔고, 최근에 그 이유를 찾았다. 바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삶은 구속이다. 그리고 그 구속을 벗어나는 과정이 삶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삶이다.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기에 자신과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 속에 매여 살아간다. 그리고 자립한 후에는 다시 이 매듭을 풀어가는 것이 삶이다. 같은 사람이지만, 매듭을 풀기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물코를 들어 올리면 모든 그물이 따라 올라온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다. 한 개인의 삶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상황과 함께 엮여있다. 사람과 상황 속에서 건강한 그물코로 살다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그 그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삶이 힘들어 또는 삶이 너무 즐거워 그물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고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가정적, 사회적 책임을 어느 정도 마친 사람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자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자신이 되는 일이다. 어느 사람이나 상황에도 치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이나 상황을 힘들게 만들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70세가 되면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欲不踰矩)’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공자가 말했다. 이는 마음먹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과연 내 나이 70에 이런 경지가 찾아올지 궁금하다.     

 

 소외는 요즘 느끼고 있는 고민이다. 가끔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기도 한다. 때로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사람인가라는 고민을 하기도 한다. 홀로 지내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고독은 스스로 홀로 지내는 것이고, 고립은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되는 상황이다. 그럼 소외는 무엇일까? 요즘 내가 느끼는 고민이 소외일까? 인간은 태어날 때 혼자이듯 죽을 때도 혼자 죽을 것이고, 함께 누군가와 있어도 결국은 혼자라는 의미가 아닐까? 소외, 고독, 고립, 외로움은 간혹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각자 의미가 다른 것 같다. 어떻든 요즘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어쩌면 소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면서 마음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소외감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을 만나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 나의 관심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큰 목소리로 떠드는 얘기를 듣는 것이 불편하다. 그리고 그 대화에 끼어들 자신도 없고, 딱히 할 말도 없다. 그래서 군중 속 고독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가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한 가지는 말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듣고 있는 사람들은 없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다.      

 

 마지막 주제인 무의미. 만약 빅터 프랭클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또 나치 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포기했다면 그들은 수용소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약 10년 전에 '동사섭'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거의 끝날 즈음에 독배를 마시는 프로그램이 있다. 연필을 오른편에 놓고 앉아 연필을 독배로 생각하고 마신 후 왼편으로 옮겨놓는 작업이다. 참석자 중 가장 먼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독배를 마시고 죽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쉽게 옮길 수가 없었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수많은 생각과 영상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많은 감정들이 올라왔는데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못한 감정이 ‘억울함’이었다. 무슨 억울한 일이 그렇게 많았는지 억울함 때문에 죽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정말 많이 울고 또 울었다. 한참 울은 후에 겨우 옮겼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옮기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억울함을 풀기 위해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던 것 같고, 그 결과물이 지금의 '나'다. 억울함이 분노로 변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 반대로 자신을 괴롭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담을 공부하고 있었던 시기여서 그런 감정을 삶의 의미로 변화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또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 상담을 공부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기도 전에 네 가지를 먼저 나름대로 생각하며 정리해 보았다. 죽음, 자유, 소외, 무의미라는 상황은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의 문제들이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삶 속에서 자유를 선택할 수는 있다. 소외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 극복해 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삶과 죽음의 선택,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으로서의 삶, 소외감을 삶의 의미로 극복해 나가는 자신의 결정과 자유의지. 실존은 이런 것들을 다룬다.  결국 삶의 문제는 문제를 통해 ‘참 자아’를 찾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실존주의 심리치료에 지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어 기쁘다. 그리고 상담심리사로서 정체성을 찾고 이 길을 꾸준히 갈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과거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지금의 정체성을 찾게 되어 기쁘다. 걷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상담심리사가 나의 정체성이고, '나'다. 그리고 이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참 자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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