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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인생 3막

어빈 얄롬과 나

by 걷고 2023. 8. 16.

 최근에 '어빈 얄롬'의 책에 빠져 지내고 있다. 어빈은 스탠퍼드 대학교 정신의학과 명예교수이며 정신과 진료를 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이자 치료자이다. 몇 년 전에 그가 쓴 소설 <카우치에 누워서>라는 책을 읽으며 그의 이름을 알게 된 후 한참 동안 그를 잊고 살았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니체가 눈물 흘릴 때>, <죽음과 삶> 등을 읽었고, 요즘에는 <비커밍  마이셀프>와 <쇼펜하우어, 집단심리치료>를 읽고 있다. 내 책상 위에는 <실존주의 심리치료>와 <집단정신치료의 이론과 실제>가 놓여있다. 앞으로 읽고 싶은 그의 책 리스트도 있다. <폴리와의 여행>, <보다 냉정하게 보다 용기 있게>, <스피노자 프로블럼>, <삶과 죽음의 사이에 서서> 등이다.    

 

 그의 책 <카우치에 누워서>라는 책을 읽으며 이 소설이 정신과 의사가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전문 작가가 정신과 의사들과 책을 통해 정보를 모아서 발간한 책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가 정작 작가보다는 훨씬 더 유명한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놀랐다. 대학원에서 상담 공부를 하며 그의 책 <집단정신치료의 이론과 실제>를 교재로 공부한 적도 있었지만, 정작 그 당시 저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수업 따라가기 바빠서 필요한 부분만 겨우 읽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2012년도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불교상담 전공으로 공부를 했고, 2015년도에 한국상담심리학회 상담심리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사설 상담센터에서 근무할 기회는 없었고, 공공기관에서 상담사로 3년 정도 근무했고, 마음복지관이라는 시회단체에서 상담 봉사활동을 7년째 하고 있다. 대학원 진학할 때는 나름 꿈이 있었다. 사회적 경험이 많고, 불교 공부를 꾸준히 해왔고, 명상 수행을 꾸준히 한 상담사를 어떤 상담센터에서든 기꺼이 받아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된 나이 많은 남성 상담사를 필요로 하는 상담센터는 없었다. 실망과 좌절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공공기관 상담사로 활동하며 조금씩 상담사로서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62세가 넘은 3년 전부터는 나를 필요로 하는 센터는 없었다. 나이 탓으로 돌리는 것이 비겁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 외에는 지난해에 근무했던 센터에서조차 서류 심사에서 떨어지는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며 상담사로서의 회의가 들면서 상담사를 포기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걷기와 상담을 접목한 프로그램 개발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걸으며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상담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 왔다는 점이다. 상담을 계속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회의도 있었지만, 상담봉사가 그나마 나 자신이 상담사라는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었기에 또 상담에 대한 감을 잃고 싶지 않아서 주 1회의 사례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상담사로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가까운 상담사 두 분과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심리도식 치료>를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시 상담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찾은 책이 얄롬의 책이다. 그의 책에서 ‘상담은 관계’라는 말이 매우 인상 깊게 다가왔다. 상담 관계가 상담의 질을 결정하고, 심지어는 내담자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상담사라는 얘기도 나온다. 상담사가 내담자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상담사-내담자 관계가 내담자를 변화시킨다는 얘기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치료자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얘기하고 있다. 내담자는 관계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간다고 한다.      

 

 관계 얘기를 읽으며 요즘 만나고 있는 내담자 생각이 났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마음복지관에 의뢰된 내담자다. 6개월 이상 상담을 진행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어 보였다. 과연 지금 진행하고 있는 상담이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또한 마음속에는 그 내담자를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심지어는 내담자를 만나기조차 싫은 날도 있었다. 과연 이 상담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 좋을까에 대해 고민을 하다 내담자에게 지금 이 상담이 도움이 되는지 또 앞으로 이 상담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었다. 내담자는 내가 자신을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렇다'라고 진실 되게 얘기하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서로 생각해 보자며 상담을 마친 후 센터 국장과 상의를 했다. 국장은 “여기저기를 거쳐 온 내담자이고 어쩌면 선생님이 마지막 상담자 일 수 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상담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이 내담자는 앞으로 찾아갈 곳이 없습니다. 굳이 어떤 성과를 내려고 하지 말고 내담자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만으로도 내담자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만두시고 싶으면 선생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라고 얘기했다. 국장이 한 얘기가 마음을 움직였다. 함께 스터디 모임하고 있던 상담 선생님들에게도 과연 이 상담을 계속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했다. 상담사 선생님들은 지금까지 내담자가 상담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참석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상담 효과가 있으니 좀 더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해 주었다. 국장과 동료 상담사의 조언이 너무 고마웠다.       

 

 다행스럽게 다음 주에 만난 내담자는 지난주 일을 기억 못 하는 것 같았다. 자주 화를 내고도 화내는 이유를 모르고, 자신이 한 얘기를 쉽게 잊어버리는 내담자다. 오히려 지난주 얘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 이후부터 내담자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내려놓고 그냥 말동무처럼 내담자의 얘기를 듣고 반응만 해 주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내담자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처럼 제 얘기를 경청하며 들어준 사람이 없었어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당황스러웠고 미안했다.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간 내담자를 물리치려 했다는 사실에 미안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 내담자를 계속해서 만나고 있다. 상담 목표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냥 만나는 그 순간에 그와 함께 하며 그의 얘기를 집중해서 듣고, 그에 맞는 적절한 반응을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요즘은 가끔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아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곤 하는데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내담자가 먼저 상담을 먼저 포기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만나서 그의 얘기를 경청해서 듣고 관심을 갖는 상담사로 남아있을 것이다.      

 

 내담자와 변화된 관계, 그리고 최근에 읽고 있는 얄롬의 책은 상담사로서 나의 정체성을 되찾아주고 있다. 1931년생인 어빈은 지금도 여전히 내담자를 만나고 서너 시간씩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오늘 아침에 문득 상담 공부를 좀 더 한 후에 상담센터를 개설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sns 프로필에 나 자신을 ‘걷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상담심리사’로 소개하고 있다. 나를 가장 적절하게 요약해서 표현한 글이다. 맞다! 나는 걷기와 글쓰기를 좋아한다. 걸으며 심신 건강을 관리하고, 좋아하는 글 쓰며 생각들을 정리하고, 제법 바쁘게 지낼 수 있고, 치매 예방도 할 수 있으니 이처럼 좋은 친구는 없다. 게다가 상담심리사로서 심리적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꽤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다. 대학원 다니면서 꿈을 꾼 것이 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와의 상담을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한 상담사이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마지막 내담자를 만나 상담을 진행하며 눈을 감고 싶다는 꿈이다. 내담자에게는 너무 가혹한 상담이 될 수도 있지만, 꿈은 꿈이니까 실현 안 돼도 좋고, 될 수 있으면 더욱 좋은 일이다.  

     

 몇 년간 헤매다 내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마음복지관이 준 기회에 고마움을 전한다. 얄롬과의 인연에 고마움을 전한다. 좌절하고 회의를 하는 도중에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를 해온 자신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걷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상담심리사’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어 기쁘다. 언젠가는 이 생각이 또 바뀔 수도 있겠지만 큰 그림에서 본다면 선 한 줄 어긋나거나 다른 색 하나 칠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이 더위를 얄롬과 함께 보내며 삶의 지루함과 무더위를 견디고 나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 준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렇다고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또 내일도 오늘처럼 지낼 것이다. 걷고, 글 쓰고, 독서하고, 상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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