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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48] 친구와 선물

by 걷고 2021. 7. 8.

날짜와 거리: 20210706 – 20210707  12km

코스: 일상 속 걷기

평균 속도: n/a

누적거리: 4,364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수원 모 기관에 채용 면접관으로 다녀왔다. 가끔 지자체 공무원 채용 면접관 의뢰가 들어온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지원자들 면접 후 면접관들이 상의를 하며 결정하는데,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나만의 판단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면접관들과 의견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 주는 심리적 편안함이 있다. 채용 인원의 두 배 이상을 서류 전형에서 선발하여 최종 면접을 보는 것이기에 지원자나 면접관 모두 부담스러운 점은 사실이다. 나 역시 상담사로 근무하기 위해 수많은 상담 센터에 지원해서 면접을 봐왔기에 지원자들의 부담을 잘 알고 있다. 면접관으로 이 점을 유의해서 가능하면 지원자들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후 2시까지 도착하면 된다. 이런 날은 늘 일찍 출발해서 근처 식당에서 식사하고 차 한잔 마신 후에 면접 장소에 도착하는 편이다. 집에서 10시경 출발해서 오후 2시 면접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이런 일상 속 여유로움이 마음을 진공 상태로 만들어 준다. 우연히 눈에 띈 돈가스 전문점, 기와집에 들어갔다. 겉은 옛날 사진관 느낌이 드는 작은 식당이다. 안에 들어가니 깔끔한 한옥풍의 인테리어가 마음에 든다. 군더더기 없이 정갈한 분위기와 종업원의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점도 마음에 든다. 안심 돈가스를 주문했다. 워낙 미각이 발달하지 않아 맛이 좋은지 구별을 할 수는 없지만, 간이 강하지 않고 고기가 부드러워 입맛에 맞았다. 한 끼 식사로는 넘치는 만 원짜리 음식을 자신에게 선물했다. 자신이 자신을 보상하는 이런 방식은 가끔 사용하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 식사 마치고 나오니 12시 20분이다 아직도 약 100분의 시간이 남아있다. 

전에 한번 들렸던 커피숍 샵 와플에 들어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주문했다. 커피 값은 싸지만, 분위기는 오성급 호텔보다 훨씬 낫다. 고전적인 유럽풍의 가구와 분위기가 마음을 아늑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큰 홀 외에 작은 방이 두 개 있다. 한 방에는 테이블이 세 개 배치되어 있고, 다른 방에는 오직 한 테이블만 놓여있다. 공간의 여유로움과 분할이 방문객에게 사적인 공간을 만들어 준다. 나는 늘, 오늘 포함해서 두 번뿐이지만, 작은 방 창가 옆에 앉는다. 낮은 원탁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다. 창가에는 작은 화분이 놓여있다. 나만의 정원이다. 한쪽 의자에 가방과 상의를 올려놓고, 원탁에는 커피, 휴대전화와 읽고 있는 책 ‘자전거 여행’ (김훈 지음)을 올려놓는다. 책을 몇 페이지 읽다가 카페에 조용히 흐르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책 읽는 것보다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 편안하다. 이런 공간에 홀로 조용히 앉아 ‘자발적 고독’을 느끼며 마음속 진공 상태를 만든다. 이 역시 내게 베푸는 큰 선물이다. 

 면접 끝난 후 버스를 타고 선바위 역에 내렸다. 길동무 한 명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사전에 연락해서 만나기로 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친구인데, 귀국 후 가끔 만나며 좋은 인연을 이어 나가고 있다. 역 근처 카페에 들어가 생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친구는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해파랑길을 모두 완주했고, 지금은 남파랑길을 약 600km 정도 걸었다. 걸은 만큼 걸으면 이 길도 완주하게 된다. 작년부터 텐트를 짊어지고 편안한 노숙을 즐기며 걷고 있다. 가끔 해변에 텐트 치고 간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사진 찍어 보내기도 한다. 그 여유로움이 좋아 보였다. 남파랑길을 걷고, 서해안 길도 걷고, 평화누리길을 모두 걸으면 2,500km에 달하는 코리아 둘레길을 마치게 된다. 몇 년 내로 천천히 걸으며 마무리할 생각이라고 한다. 그 친구의 걷기를 응원한다. 

선바위역 근처 카페에 앉자마자 검은 종이 상자에 하늘색 노끈을 두른 선물 보따리를 내민다. 액자에 넣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사진과 이라체 수도원 앞에서 물을 담고 있는 나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친구의 세심하고 따뜻한 정성이 고맙다. 사진을 보며 산티아고의 기억이 되살아 난다. 이라체 사진 속 나의 모습에는 어색함과 긴장감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산티아고 길 초입에 있는 곳으로 아직 순례자(?)가 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긴장, 걱정, 불안, 그 속에서 여유를 되찾으려 애쓰는 모습 등이 보인다. 피레네 산맥을 오르는 사진을 보며 그 당시의 여러 감정들이 떠오른다. 생쟝에서 첫날 출발해서 이 산맥을 넘어야 된다.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넘어야만 된다는 생각이 많았었고, 강렬한 햇빛, 비, 바람, 싸라기 눈 등 하루에 사계절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얼마 전 그 친구에게 책 한 권, ‘소금길’을 추천했다. 갑자가 노숙인 신세가 된 영국인 부부가 약 1,000km에 달하는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며 역경을 극복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 친구에게 이 책을 추천했던 이유는 같이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제 만나 길에 대한 얘기, 걷기와 야영에 필요한 장비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책 얘기를 하며 ‘소금길’에 나온 해안도로를 같이 걷자는 얘기를 했다. 잠정적으로 후년 봄에 걷기로 구두 약속을 했다. 내년에는 야영 장비를 준비해서 같이 남해안 길을 걸으며 야영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예행연습도 하기로 했다. 영국 해안도로를 걸으며 내내 야영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스트 하우스에도 머물고, 상황이 여의지 않거나 경관이 너무 좋은 곳에서는 야영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국내 길을 걸으며 숙박을 위해 길에서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 번거롭고 가끔은 피곤하게 느껴졌다. 걷기에 필요한 것은 걷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밖에는 없다. 가장 불편한 것이 잠자리다. 야영을 준비하면 걷는 도중 아무 곳에서나 쉬거나 수면을 취할 수 있다. 먹는 것은 배 고프지 않을 정도로 아무 음식이나 먹으면 된다. 걷는 것은 그냥 걸으면 된다. 숙박을 위해 예약을 하거나 길에서 벗어나 먼 곳으로 이동하고, 다음 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일은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다. 길에서 먹고 자고 걷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직 야영을 해 본 경험이 전혀 없지만, 내년에 연습 몇 번하면서 천천히 익숙해질 것이다. 소금길 다녀온 후에는 야영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국내 어느 곳을 걸어도 숙박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친구와 나는 홀로 걷는 것의 중요함과 위험성을 알고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혼자 활동 시 혹시나 발생할 위기 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아내는 심지어 가까운 뒷산에 올라갈 때도 혼자 가는 것을 그다지 탐탁하지 않게 생각한다. 산티아고에서 같이 걸었고, 국내에서도 몇 번 같이 걸어서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특히 걷는 속도나 함께 걸으며 각자 걷는 것에 두 명 모두 익숙해져 있다. 편안하고 좋은 길동무가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길에서 만난 친구가 좋은 길동무가 되었다. 그 친구와 만나며 길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좋은 친구가 있어서 더욱 좋다. 길 얘기를 하니 다시 떠나고 싶어 진다. 잠재해있던 욕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설렌다. 지금 양평 물소리 길을 걷기 시작했다. 9월 중순에는 지리산 둘레길을 열흘 정도 걸을 계획이다. 친구와 함께 가는 조건으로 아내의 허락을 받았다. 11월에 남은 지리산 둘레길을 열흘 정도 걸으며 완주할 생각이다. 내년에는 제주 올레길을 홀로 걷고, 친구와 함께 남파랑길도 걸을 생각이다. 후년에 떠날 소금길을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기분 좋은 설렘이다. 

 

식사와 차 한잔 마시며 자신에게 선물을 베풀었다. 온전히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서 심신이 진공 상태에서 머물며 충분한 휴식 시간을 보냈다. 친구를 만나 선물을 받았고, 길 얘기를 하며 앞으로 함께 걸어갈 길 얘기를 했다. 충만한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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