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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46] 나는 오늘도 그냥 걷는다

by 걷고 2021. 7. 4.

날짜와 거리: 20210703  13km

코스: 서울 둘레길 구파발에서 증산역까지

평균 속도: 3.2km

누적거리: 4,327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장마 소식이 있다. 바람이 제법 분다. 햇빛은 거의 없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산길을 걷는 재미는 아주 특별하다. 바람소리는 가슴을 뛰게 만든다. 약간의 긴장감과 시원함, 그리고 설렘이 있다. 비를 머금은 바람은 청명한 날의 바람과 분위기가 다르다. 바람 속에 물기를 품고 있다. 바람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장마를 머금은 바람소리는 약간의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바람이 미세먼지를 날려버려서 세상이 밝게 보인다. 저 멀리 웅장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북한산의 능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산에서 바라본 시내의 모습도 윤곽이 뚜렷하다. 오랜만에 깔끔한 선으로 하늘과 풍경을 구분해 놓았다. 마치 날카로운 샤프 연필로 선을 그려놓은 듯하다. 

 

 구파발에서 증산역까지 연결된 서울 둘레길은 주로 산길이고 계단이 제법 많다. 하지만, 증산역에서 구파발까지 가는 길보다는 조금 쉽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둘레길 코스 중 난이도 면에서 상급에 속하는 이 길은 가끔 걷기 싫을 때도 있다. 오르막도 많고 계단이 많아서 꺼리기도 한다. 반대로 가끔 몸에 땀을 내고 싶을 때에는 일부러 이 길을 찾아서 걷는다. 땀을 흘리면 온몸의 찌든 때를 씻어내는 듯한 상큼함을 느끼기도 하고, 마음속 답답함과 번뇌도 날려버릴 수도 있다. 몸이 고되면 쓸데없는 생각은 저절로 사라진다. 편한 길을 만나 편안하게 걷고 싶고 빨리 도착했으면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들어 올 틈이 없다. 

 최근에 우연히 ‘그냥 걸으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힘든 길이나 편안한 길이나 길은 길일뿐이다. 다만 조금 힘들고 편안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힘든 길은 걷기 싫거나 꺼리게 된다. 가파른 언덕길이나 수많은 계단을 만나면 먼저 한숨이 나오기도 하고, 언제 힘든 길이 끝날 수 있을까라는 조급함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런 생각들이 오히려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이런 생각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생각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힘든 길도 큰 걱정 없이 무난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길은 그냥 길일뿐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반드시 있다. 오르막 계단이 있으면, 그다음에는 내리막 평지가 이어진다.

 

 예전에 전문 등산가와 함께 겨울 산행을 했던 적이 있다. 눈길을 겁내고 있던 내게 그 등산가가 해준 말이 있다. “눈을 눈이라 생각하지 말고 흙이라 생각하세요. 그리고 편안하게 걸으세요.” 이 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조금 미끄러져도 발 밑에 눈이 뭉쳐 둔덕을 만들어 주면서 자동적으로 멈추게 된다. 그다음부터 눈길을 걸을 때 조심하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겁 내지는 않게 되었다. 최근에 든 생각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길은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그냥 길일뿐이다. 계단도 길일뿐이고, 돌길도 길일뿐이다. 길은 걸으면 된다. 걸으면 언젠가는 도착지점에 도착할 수 있다. 미리 겁을 먹거나, 걱정하며 걷거나, 편안하게 걷거나 결과는 같다.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도착하게 되어 있다. 오르막 길을 만나든, 돌 길을 만나든, 수많은 계단 길을 만나든 어차피 걸어야 할 길이라면 그냥 걸으면 된다. 

 우리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수많은 상황을 맞이하며 한 평생 살아간다. 중간에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도착지점에 도착할 것이다. 그 과정에 오르막, 내리막도 있을 것이다. 탄탄대로를 걸을 때도 있고, 너덜 길을 걸을 때도 있을 것이다. 비가 오거나 폭풍이 몰려올 날도 있고, 청명한 하늘에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자연의 혜택으로 수많은 먹거리를 얻을 수도 있고, 허리케인과 토네이도가 몰려와 온 세상을 파괴할 때도 있다. 날씨는 매 순간 변한다. 날씨는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일기예보로 사전 대비는 할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외의 것은 자연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수많은 길의 모습이 있듯이, 삶 속에 수많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좋은 길만 걸을 수 없듯이, 좋은 상황만 맞이할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택과 결정할 수 있는 일뿐이다. 그 외의 상황은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선택과 결정할 수 없는 일들은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길을 걷듯이 그냥 상황을 맞이하며 살아가면 된다.

 

 길을 걸으며 ‘그냥 걷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삶을 살아가며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럼에도 길을 걸으며 또 살아가며 힘든 순간에는 빨리 벗어나고 싶거나 피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기도 할 것이다. 이런 마음이 욕심이다. 언젠가는 이런 욕심마저 버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만나기 위해서 오늘을 걷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그냥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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