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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20]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것이 주는 자유

by 걷고 2021. 5. 16.

 비가 차분히 내리는 일요일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뭔가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강박과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마감 기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꼭 써야 될 일도 아닌데 글을 써야 하루를 충실하게 살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도 아닌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니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를 써야만 마음이 편안하다. 일종의 ‘글 쓰기 중독’에 걸린 것 같다. 그나마 술 중독, 약 중독, 성 중독, 도박 중독, 관계 중독 등 부정적인 중독이 아닌 것이 다행이다. 그럼에도 굳이 써야 할 이유도 없고 안 쓴다고 누군가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닌 일을 하는 것이 주는 자유도 있다. 그냥 쓰고 싶은 것을 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자유롭게 만든다. 책 발간을 염두에 두고 쓰지도 않으니 독자를 의식해서 쓸 필요도 없고 쓰고 싶은 대로 쓴다. 편안하고 자유롭다.

 

 아내는 매주 일요일에 처갓집에 간다. 매일이 휴일인 백수지만, 일요일은 특이 더 자유로운 휴일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홀로 TV 시청하는 일이다. 아침에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KAIST 총장이 게스트로 나와서 TV와 조직도를 거꾸로 설치해 놓고 본다는 얘기를 했다. 굳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각으로 봐야만 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방향만 보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시간에 같은 자세로 자고, 같은 방식으로 일 하고, 같은 놀이를 한다면 끔찍한 세상이 될 것이다. 마치 영화 ‘트루먼 쇼’ 같은 세상이 될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총장 덕분에 우리나라의 IT 업계를 이끄는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탄생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나고 튀고 싶어 하면서도 남이 튀는 것을 싫어하는 이상한 논리를 갖고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존중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그다음에 한 일이 도서관에 가서 책 반납하고, 책 빌리고, 두 시간 정도 책을 읽은 일이다. 비 오는 날 세 권의 책을 종이 백에 넣어서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우산을 쓰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굳이 비 오는 날 책 반납하러 가지 않아도 되는데 반납하러 갔다. 요즘은 책을 읽으며 책 속에 소개된 다른 책이 있으면 휴대전화 노트에 저장을 해서 보관한다. 도서관에서 검색한 후에 위치 안내 쪽지를 출력해서 서가에서 책을 찾는다. 이때 가장 힘든 것이 서가 맨 아래 칸에 있는 책을 찾는 일이다. 다초점 렌즈 안경을 쓰고 있어서 초점도 맞지 않아 안경을 벗고, 연골 파열 수술로 인해 무릎 구부리기가 불편한 사람이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책을 찾는 모습은 남에게는 꼴불견이요, 자신에게는 고역이다. 책을 겨우 찾은 후 일어나면 머리가 빙 돌며 잠시 어지럼증이 찾아온다. 서가에 손가락을 의지해서 몇 초간 버티며 진정시킨다. 노화를 실감하기에 이만큼 적절한 경험도 없다. 서가 높은 곳에 책을 진열하고 찾기 위한 사다리는 있는데, 왜 서가 맨 밑 칸의 책을 찾기 위한 낮은 의자나 방석을 없을까? 요가 매트 같은 것이 있으면 편안하게 누워서 찾을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이상하고 다른 생각을 이해해 줄 도서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은평구 참여 주민 기자로서 사명감을 발휘해 언젠가는 제안을 해 볼 생각이다.

 

 책을 빌린 후 열람실에 들어가 두 시간 정도 읽었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 사람들 간의 간격이 넓어져서 책 읽기는 오히려 더 편안하다. 중년들은 교재나 유튜브를 보면서 뭔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무슨 자격증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학생들은 참고서나 유튜브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한다. 모두 목적을 갖고 책을 읽거나 공부하고 있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읽고 있다.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욕심 내어 네 권이나 빌려서 책을 읽고 있다. 요즘 읽고 싶은 책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휴대전화 노트에 기록된 책만 해도 최소한 마흔 권 이상이 되는 것 같다. 앞으로 이 리스트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늘어날 것 같다.

 

 집에 돌아와서 점심을 차려 먹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굳이 쓸 필요도 없고, 꼭 써야 할 이유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이 글을 쓴 뒤에는 빗속을 걷기 위해 나갈 것이다. 비 오는 날 걷는 것을 좋아하고, 어제 걷지 않아서 몸이 걷고 싶다고 조르고 있다. 굳이 걸일 필요도 없고, 걷지 않아도 되는데도 걸으러 나갈 것이다. 걷기 동호회에서 길 안내를 자청해서 하는 것도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해야만 하는 상황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하는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면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있다. 글 쓰기, TV 시청, 독서, 명상, 걷기 등이 그 일들이다.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고, 하지 않는다고 무슨 큰일이 발생하는 것도 아닌데 하고 있다.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그냥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자신에게 큰 해방감을 준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자족감을 준다. 불과 얼만 전 까지만 해도 상담도 하고, 강의도 하고, 명상 지도도 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돈도 벌고 싶어 안달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런 일들은 기회가 오면 하면 된다. 굳이 찾으러 나설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한다. 할 일이 없어도 불편함이나 불안감이 많이 사라졌다. 만약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견디는 힘이 더 생겼다는 것이다. 좋은 일이다.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여기에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바로 걷고, 글 쓰고, 독서하고, 명상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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