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걷고의 걷기일기

어느 메시지가 던진 메시지

by 걷고 2025. 5. 19.

최근에 밴드에 가입한 사람이 밴드 메시지를 보내왔다. 기존 회원 중 아는 분이 있는데, 감사의 말씀을 전할 일이 있으니 연결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메시지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죽기 전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또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의 내용으로 봐서는 쉽게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학교 밴드가 아닌 예전에 글을 올렸던 밴드 페이지에 올라온 메시지다. 잠시 고민 후 만나고 싶다는 분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연결해 드려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아직 답변은 없다.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다. 답변이 오면 연결시켜 드리면 되고, 아니면 그냥 두는 수밖에.

메시지를 받고 나서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 첫 번째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은 대단하다는 점이다. ‘죽기 전’이라는 단어 때문에 연결을 해드리려 노력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괜히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나의 죽음이 아님에도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리고 갑자기 내게 죽음 선고가 내려진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자문을 해 보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기에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무척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를 것 같다.

죽음 앞에서 모든 감정과 생각은 힘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에 대한 원망, 자신에 대한 절망, 사랑과 미움, 성공과 실패, 욕망과 허무, 삶의 가치와 무의미 등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다. 또한 그간 추구해 왔던 모든 것들의 의미가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안정이 되고 수용하며 죽음 앞에 오히려 더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사랑과 미움, 좋고 싫음,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오히려 이런 순간이 오직 Doing Mode의 존재가 아닌 Being Mode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나의 표현이 큰 결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나의 생각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며 동시에 만약 상처가 되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

“죽기 전에 감사함을 꼭 전하고 싶어서”라는 문장이 주는 울림 때문에 떠오른 또 다른 생각이 있다. 내게도 그런 분이 계셨다. 내가 죽기 전이 아니고, 그분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뵈었어야 했던 분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방황할 때가 있었다. 그 당시 일본어 교수님이신 하기와라 교수님께서 수업 마친 후 연구실로 오라고 하셨다. 찾아뵈었더니 책을 사보라고 용돈을 주시며 격려를 해주셨다. 그 당시 가출을 했던 상황이었고, 돈이 무척 궁색한 상황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사실을 알리지도 못했고, 혼자 전전긍긍하며 도서관에서 잠을 자며 지낼 때였다. 교수님께서 어떤 모습을 보고 그러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상시보다 이상하게 느끼신 점이 있으셨기에 격려와 용기를 주셨던 거 같다. 졸업 후 찾아뵙지를 못했다. 어쩌면 그런 상황이 부끄러웠을 수도 있고, 교수님을 찾아뵐 용기가 없었을 수도 있다. 이 글을 통해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고, 지금은 나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기와라 교수님! 교수님 덕분에 성실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살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좋은 사람, 때로는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미운 사람이 고마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람 관계는 늘 변한다. 나 자신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한다. 그러니 어제 만난 사람을 오늘 만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 속 어제의 사람을 오늘 만나며 새로운 사람으로 대하지 못한다. 기존의 기억과 감정, 생각으로, 즉 과거의 ‘그’를 현재의 ‘그’로 착각하며 만난다. 상대방 역시 그럴 것이다.

이제는 서서히 이런 착각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 그리고 매 순간 그 사람을 어떤 편견이나 판단, 평가 없이 온전히 바라보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동일한 사람도 때로는 고맙고, 때로는 밉다. 오늘 만난 사람을 내일도 만난다는 어떤 보장도 있을 수 없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반드시 부정적인 상황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변화로 나오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만난 사람에게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잘 대해주면 된다. 자신의 평가, 판단, 사고, 기준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아끼고 존중하고 배려하면 된다. 설사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도, 그것은 나의 감정에 불과하므로 내가 변화시키면 된다. 괜히 상대방에게 화살을 쏴봐야 결국 부메랑이 될 뿐이다. 만약 오늘 만난 사람과의 만남이 이생의 마지막이라면 어떻게 대할까? 답은 명명백백하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찾아가 만나고 싶다. 잘못한 점이 있었다면 만나서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고마웠던 점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과거의 감정은 만나서 표현하고,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편견, 판단, 평가 없이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면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은 후에 잘 대해주지 못했다고 후회를 하며 운다. 특히 부부간이나 가족 간에 더 그런 것 같다.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여기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가족을 포함하여, 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표현하며 살아가자. 미움도 슬픔도 억울함도 원망도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사라진다. 그런 마음을 안고 죽는 것보다는 사랑, 기쁨, 감사함을 안고 눈을 감으면 행복한 죽음이 될 수 있다. 하나의 갑작스러운 메시지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원하는 분과 연결이 되어 좋은 만남을 이어가길 바란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