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상담 공부할 때 집단 상담에 집단원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상담 시 자신의 얘기를 꺼내게 되고, 그 얘기에 대한 피드백을 집단원 간에 주고받으며 상담이 진행된다. 다른 집단원이 나에게 피드백으로 “수고 많이 하셨네요.”라는 표현을 하면 괜히 감정이 복받쳐 올라 먹먹했다. 그 말이 억울한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독거려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억울한 것이 많았는지. 시간이 흘러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집단 상담을 진행한 적이 있다. 회기 마칠 즈음 집단원 중 몇 명이 ‘수고했네요. “라는 나의 피드백을 들으며 위로를 받고 울컥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세월을 살아볼 만큼 살아온 사람들이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이 고생한 것에 대해 위로와 이해받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폭삭 속았수다’라는 제목은 참 잘 지은 제목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부부의 삶의 모습이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시청을 하고 마치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대신 표현해주고 있다고 공감을 해서 인기 드라마가 된 거 같다. 삶의 과정에서 겪는 수많은 상황, 사람들 간의 갈등, 행복과 불행,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등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비록 겪는 희로애락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그 양은 거의 비슷하다.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얘기한 ‘잠 총량의 법칙’이 있듯이, ‘삶의 희로애락 총량의 법칙’도 있다. 다만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겪은 희로애락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크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생활에 강하고, 아버지는 생존에 강하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가족을 돌보고 베풀며 살아가고, 아버지는 가족의 부양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간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자신만의 삶은 없고 책임과 의무만 있다. 가끔 이런 사실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런 사실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이 덕분에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전통적인 우리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70대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 또 그렇게 살아왔지라고 드라마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 드라마를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가족문화가 변하고 있다. 아이들의 삶이 존중받고 중요하듯, 부모님의 삶 역시 존중받고 중요하다. 옳고 그름은 없다. 세월의 흐름에 맞게 살아가면 된다.
이 드라마를 보고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사람의 감정을 내레이션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무척 세심하고 정확하고 치밀하다는 것이다. 마치 핀셋으로 중요한 감정만 찍어 집듯이, 감정을 콕콕 집어내어 감정 없는 멘트로 표현한다. 시나리오 작가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감정 표현이 너무 섬세하다. 놓치기 쉽거나 드러내기 싫어하는 감정도 콕 집어 표현한다. 마치 시청자들에게 너희들이 이런 행동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감정을 갖고 있었지라고 말을 하는 느낌이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고맙고 부담스러워 화를 내고, 아버지의 무한한 헌신이 고맙고 미안해서 짜증 난다고 얘기한다. 아이들이 무슨 표현을 하든 부모는 그 이면의 마음을 보고 듣는다. 그래서 서로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감정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만큼 서로에게 상처도 준다. 물론 그 상처는 칼로 물을 베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그 칼이 무섭고 날카로워 주저하거나 피하기도 한다. 부모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양관식이 죽기 전 병실에서 딸에게 살아온 지난 에피소드를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 딸은 울고 웃고 하며 아버지와 헤어질 준비를 한다. 딸에게 엄마를 잘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한다. 아버지와 딸이 지난 과거 얘기를 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을 보며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양관식이 부러웠다. 나는 감정 표현을 말로 잘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딸이나 사위에게도 마음과 다르게 표현을 하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에 양관식처럼 딸과 같이 병실에 누워서 지난 얘기를 나눌 용기도 없다. 아마 나의 약한 모습,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며 집으로 돌려보낼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굳이 나의 모습을 바꾸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나의 모습대로 살아갈 것이다. 다만 가끔 글로 딸과 사위, 손주들에게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는 싶다.
오래전에 한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유언장 쓰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첫 문장이 ‘소연아, 미안하다. “였다. 그 문장을 쓰고 많이 놀랐다. 아빠로서 할 일은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문장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겉으로는 아빠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더 해 주지 못한 것이 늘 미안했던 거 같다. 부모는 이런 존재다. 해줄 수 있을 만큼 해 주었음에도 늘 뭔가 더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존재다. 부부사이에서도 그렇다.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도 늘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하고, 오랜 세월 삶의 무게를 같이 버텨주고 함께 살아줘서 고마워한다.
양관식의 죽음을 보며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 그의 삶을 보며 나의 삶을 생각해 본다. 이제는 미련도 후회도 모두 던져버리고,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의 죽음을 살 것이다. 인간은 본래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혼자일 수가 없다. 심지어 수행자조차 가르칠 수 있는 제자나 신도가 필요하다. 하물며 희로애락 속에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희로애락의 원인과 결과가 바로 다른 사람, 가족을 포함한, 때문에 또는 덕분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이 드라마를 보며 인간의 삶은 거기서 거기고, 살다가 죽는다는 진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고,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다른 삶의 방도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그렇다면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굳이 미워하고, 서로 싸우며 살 필요도 없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조금 더 웃고, 베풀고, 사랑하며 살고 죽으면 된다.
얼마 전 죽음에 대한 강의에서 ‘죽음의 질’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이제는 ‘삶의 질’ 보다는 ‘죽음의 질’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때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 면이 휘거나 망가지면, 다른 쪽 면도 그렇게 된다. 한쪽 면이 웃거나 밝으면, 다른 쪽 면도 그렇게 된다. 주어진 삶을 그저 ‘그러려니’ 또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며 웃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된다. 어제의 삶은 이미 어제로 죽었다. 내일은 삶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오직 ‘지금-여기’에서 만의 삶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1초 전의 일도 이미 전생이고, 1초 후의 일도 역시 내생이다. 그러니 과거의 삶이나 미래의 삶을 갖고 시시비비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웃으며 살아가자. 그동안 오랜 세월 살아오신 모든 분들께 “폭삭 속았수다”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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