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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03] Fight or Flight (투쟁-도피 반응)

by 걷고 2021. 4. 13.

날짜와 거리: 20210412  12km

코스: 불광천 – 한강변 – 월드컵공원 – 월드컵경기장 – 불광천

평균 속도: 4.5km

누적거리: 3,676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아침에 늘 하는 일이 있다. 명상, 신문 보기, 글쓰기나 유튜브 동영상 촬영 및 업로드 등이다. 이런 루틴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요즘 증권 공부를 하는데 강사가 내어 준 과제가 있다. 지금까지 배운 방식으로 어느 회사 주식을 매수할 것인지, 그 회사를 선정해 오는 일이다. 배운 내용과 다른 책에서 읽은 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원칙을 만들어 선정하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모두 마치고 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걷는 것을 좋아한다. 옷을 챙겨 입고 등산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 걷기 시작했다. 등산화를 신는 이유는 발이 비에 젖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경등산화도 방수가 된다고 하는데,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별로 효과가 없다. 

 

 

 불광천에 나가니 우산을 쓰고 걷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나처럼 비 맞고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걸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바람도 제법 분다. 우산을 놓치지 않으려 손아귀에 힘을 준다. 바람과 맞서는 기분도 괜찮다. 저항과 맞서는 것이 반드시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 비와 바람과 함께 놀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항 속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저항’이라는 단어보다는 ‘자연과의 놀음’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빗속을 걷다가 예전에 지리산에서 비를 만났던 기억이 났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빗방울이 우의에 부딪치는 소리와 강도가 누군가가 콩을 장난감 총에 넣어서 나를 향해 무한 발사하는 느낌이었다. 빗방울이 강한 바람과 만나면 마치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와 감각을 느낄 수도 있다. 

 

 인적이 없는 한강변을 걸으며 가끔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는 길을 홀로 걸을 때 느껴지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다. 노을 나들목에서 노을 공원에 진입하는 토끼굴에 누군가가 누워있다. 좁은 통로에 누군가가 누워있으니 괜히 신경이 쓰인다. 아마 노숙인 일 가능성이 있다. 괜히 좁은 길을 지나다가 시비가 생길까 걱정되어 그 길을 통과하지 않고 다시 한강변으로 나왔다. 겁이 많은 사람이다. 가끔 길이나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때 이상한 사람들과 마주칠 경우가 있다. ‘도를 아세요?’라는 질문을 하며 다가오는 경우,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는 경우, 또는 정신 이상으로 보이는 경우 등에는 그 자리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행동이 예상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예전보다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그런 두려움이 남아있다. 

 

 

 Fight or Flight (투쟁/도피 반응)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있다. 갑자기 신체적인 위협을 느낄 때 그 대상과 싸우거나 아니면 피하는 생존을 위한 내재된 본능이다. 신체적 위협의 경우에만 적용되지 않고 대인관계에서도, 또는 외부 상황에서도 투쟁/도피 반응은 존재한다. 간단한 예로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걸으러 나갈지 말지도 투쟁/도피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비와 걷기’라는 도전 상황에서 ‘비는 오지만 걸으러 나가자’라는 생각과 ‘비가 오니까 나가지 말자’라는 내면의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얘기다. 상담을 하다 보면 가끔 대인관계 문제로 찾아오는 내담자들을 만나게 된다. 주변 사람들과 만나면서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면 관계를 단절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이런 상황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그럴 용기나 힘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 같다. 이런 내담자들에게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 의견,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상담 장면을 통해서 조금씩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표현해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얻은 후 외부 상황에 적용해가며 스스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사람, 환경, 또는 자신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매 순간 도전을 받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주도권을 지킬 수도 있고, 아니면 포기할   수도 있다. 자기 주도권이란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지키는 중요한 일이다. 또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도 인정해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과의 불화 중 대부분은 상대방이 자신의 뜻에 맞춰주거나 따르지 않을 경우에 발생하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조차도 자신의 의지와 뜻에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도, 자신의 모습은 개의치 않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불평하거나 심지어 비난을 하기도 한다. 

 

 매번 상황이 닥칠 때 무조건 도피하는 방식은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투쟁 대신 도피만 한다면 점점 자신은 위축이 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날려버릴 수도 있다. 대인관계에서는 단절 선언보다는 불편함을 인내하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을 통해서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외부 상황에서 조금 힘에 부치는 일에도 도전을 감행하며 능력과 한계를 확인할 수도 있다. 자신과의 갈등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일단 시도한 후에 느끼는 좌절감도 때로는 시도하지 않은 것보다는 건강할 수도 있다. 시도 후에 느끼는 성취감의 효과는 자기 효능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대부분 상황을 맞이할 때 직접 시도는 하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시도를 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이런 방법은 자신에게 실패만 안겨 주고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사고의 틀만 강화시켜줄 뿐이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머릿속으로 실패를 하는 것보다는 실행을 하면서 느끼는 실패는 다음 시도를 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머릿속 좌절과 실패보다 실제 행동과 시도를 통한 좌절과 실패가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면 노력해서 채우면 되고, 시도 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자신의 능력을 확장시켜 나갈 수도 있다. 투쟁/도피 반응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태도이지만, 삶의 주도권을 찾고 활기차게 살 수 있는 매우 좋은 공부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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