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쉬운 편이다. 말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거나 정제되지 않고 거친 생각이 날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물론 내면에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거칠고 덜 성숙된 모습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마음도 같이 있기에, 겉으로 표현된 말 자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글은 쓴 후에 수정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 보통 네댓 번 정도 읽으며 수정을 반복한다. 따라서 거친 표현은 정화되고, 잘못된 표현은 교정하고, 뜻이 잘못 전달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장이나 단어는 수정한다. 꾸준히 글을 써와서 그런지 이제는 글로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것이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다. 나의 말은 내가 하는 말이지만 믿을 수 없는 구석이 많은데, 반면 글은 내가 쓴 글이지만 나 스스로 신뢰할 수 있다.
오랫동안 글로 생각을 표현해서 그런지 표현하고 싶은 말이나 감정을 쓰지 않으면 가슴속 한 부분이 답답하고, 뭔가 할 일을 마치지 못한 찝찝함이 느껴진다. 이 글은 그런 찝찝함을 개운하게 만들기 위해 쓴 글이다. 3박 4일간 해파랑길을 다녀왔다. 길벗과 함께 멋진 추억을 가득 만들고 모두 안전하게 다녀왔다. 중간에 힘든 기억도 있었지만, 이는 이번 여정이 주는 선물이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좋았던 기억보다는 힘들었던 기억이 오래오래 남아 추억을 만든다. 거센 빗줄기와 어둠 속에서 헤맸던 시간과 오만 보를 걸었다는 기쁨, 이 두 가지가 가장 인상 깊은 추억이다. 길을 마치기 전에는 곧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천천히 걷고 싶기도 할 만큼 길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동시에 차 시간에 맞춰 역에 도착해야 한다는 초조함도 있었다. 머물고 싶은 마음과 시간에 쫓기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지니고 마무리했다.
길을 떠나며 전철 안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터로 가고 있었고, 나는 자유를 찾아 길을 걷기 위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핸드폰과 가방을 들고 있었고, 나는 빈손에 배낭을 메고 있었다. 현지에 도착 후 남들이 체크아웃하는 시간에 우리는 체크인을 하고 짐을 가볍게 만든 후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는 시간에 사람들은 일터에서 일을 하고 있다. 걷기 마치고 식당에 들어가는 시간에 식당은 문을 닫은 곳이 있었고, 우리는 그 시간에 식사를 해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는 걷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했고, 사람들은 일터로 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새벽 시간에 우리는 걸었고, 포항제철은 24시간 내내 불을 밝히고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이방인이 되어 가고 있었고, 마침내 되었다. 걷기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편안함을 느끼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방인이 현지인이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떠나기 전의 나와 3박 4일간 걸은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다.
오랫동안 사업을 하며 늘 ‘을’의 입장에 서 있었다. 계약을 수주하는 사람으로서는 ‘갑’의 의사를 존중하고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다. 사업을 접은 지 10년이 넘어가는데도 그런 태도는 여전히 뼛속 깊이 남아 있다가 어떤 상황을 맞이하면 잊고 있었던 ‘을’의 다소 비굴하고 습관적인 태도가 나온다. 단톡방이 여러 개 있다. 대부분 지인과 소통하기 위해 만든 톡방이다. 하지만, 가끔은 무의미한 글이나 잦은 알람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단톡방에서 나가자니 내키지 않고, 가만히 있자니 불편하다. 그래서 이모티콘을 쓰기도 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자신이 ‘을’의 입장이 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근데 이번 여정을 마친 후 보고 싶거나 답변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아니면 그냥 두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내게는 큰 변화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을 의식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 삶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늘 불편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 이번 여정에서 이와 관련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이런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스스로 만든 불편함을 나 스스로 풀어낸 것이다.
여행 다녀온 지 불과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이틀간 지난 과거를 곱씹고 있는 자신을 꽤 자주 발견한다. 대부분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그 사람으로 인한 불편한 상황이 많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과 미래의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가정과 상상을 하며 마음속으로 비난과 불평을 쏟아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때로는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해 감정이 격해지며 부정적인 감정을 강화시키고 있을 때도 있다. 나 자신이 얼마나 과거에 묻혀 살고 있는지 확실하게 보았다. 얼마 전 한 사람이 약속을 어긴 적이 있어서 그 불편함이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한 과거의 행동에 대해 현재인 지금까지 계속 불편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난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데도 현재 이 순간에 그것을 붙잡고 씨름하며 혼자 씩씩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고 한심스러웠다. 이 상황이 과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아주 좋은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 여정을 마친 후 과거가 자주 떠오르는 것을 보며 앞으로 조금씩 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아침에 한 시간 정도 명상을 한다. 좌복에 앉아 있는데 명상의 주제인 호흡은 사라지고 다음 해파랑길 구상만 하고 있다. 호흡은 지금-여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데, 한 달 후 진행할 해파랑길 생각을 하며 명상을 한다고 앉아있다. 아마 앉아있는 시간의 채 10%도 호흡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내일은 11%, 모레는 15% ,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앉을 생각이다. 늘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적어도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 구업과 신업을 짓지 않을 테니 하지 않는 것보다는 꾸준히 앉는 것이 나을 것이다.
과거는 괴로움을 만들고, 미래는 헛된 꿈을 만든다. 게다가 과거와 미래에 빠져 사는 동안 현재는 사라진다. 글에서 또 말을 통해 지금-여기에서 살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과거에 묻혀 살고 있고, 미래라는 헛된 꿈속을 헤매며 살고 있다. 삶은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 지금을 살아가는 일이다. 아내는 아침 7시 전에 동네 지인과 함께 아파트 주변을 걷는다. 그 시간에 나는 좌복에 앉아 명상 아닌 명상을 한다. 식사 전 스트레칭과 팔 굽혀 펴기 30회, 스쾃 50회를 한다. 아침 식사를 같이 하며 손주들 얘기를 한다. 식사 후 신문을 보고 TV를 틀어놓고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아내가 할인매장에 다녀오며 짐이 무겁다 하여 버스 정류장에 짐꾼으로 나가 짐을 대신 들고 같이 식당에 가서 자장면과 짬뽕을 먹으며 점심 식사를 한다. 아내는 집에서 쉬고, 나는 집 앞 천변을 걷는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고, 아내는 또 동네 지인과 마트에 다녀온다고 나갔다. 할 일을 각자 또는 함께 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지금-여기라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과거가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큰 욕심도 없다. 지금처럼 살아가면 된다는 편안한 마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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