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걷고의 걷기일기

인생 3막의 과업

by 걷고 2024. 10. 5.

인생을 3막으로 나눈다. 1막은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 덕분에 만들어진 삶이다. 이때는 모든 것을 지원받고 자신이 할 일만 하면 된다. 대부분 태어나서 학교 졸업까지가 1막이다. 2막은 홀로 서는 시간이다. 직업을 갖고 가정을 이루고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의 역할에 매진하는 시기다. 할 일을 하기도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 많은 시기다. 자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시기다. 2막은 졸업 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살아가며 가정을 만들고 지키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시기다. 그리고 퇴직하고 자녀들을 결혼시키며 가정적, 사회적 의무를 마치며 2막 커튼은 내려진다. 3막은 다시 올라가며 홀로 서는 시기가 도래한다. 그동안 쓰고 살았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시기다. 2막의 정체성은 자신의 꿈을 만들고 이루고 실현하며 만들어진다. 하지만 3막에서는 2막에서 만들어진 정체성을 부수고 참자신과 만나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칼 융은 중년의 삶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분석심리학자다. 자신의 가정적 그리고 사회적 역할을 어느 정도 완수한 후의 삶인 중년의 삶이 인생 전반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업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가면을 쓰고 자신의 꿈과 역할에만 충실하게 살아온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이제는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인생 3막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체념하고 살아가며 우울감을 느낄 수도 있고, 이 우울감은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고 스스로 동굴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인생 3막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는 매우 중요한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삶의 의미는 결국 “왜 태어났는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요즘 함께 걷는 길벗들은 대부분 인생 3막에 있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퇴직하고 자녀들은 결혼을 했거나 성인으로 독립한 삶을 살아간다. 퇴직을 했으니 사회생활을 마무리한 것이고, 자녀들이 모두 성장했으니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어느 정도 마무리 한 상황이다. 지금부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가 우리들 앞에 놓인 인생 3막의 과제다. 어떤 무대를 꾸미고 싶은가? 과거의 삶 즉 인생 1막과 2막을 그리워하거나 그때에 파묻혀 지금을 살고 싶은가? 아니면 자신만의 3막을 올리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며 살아가고 싶은가? 선택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인생 3막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1막과 2막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 수 있지만, 3막은 그렇지 않다. 오로지 자신만의 두 발로 우뚝 서야만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가장 근원적인 질문 즉 “나는 누구인가?‘를 하며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일이다.     

 

우리는 살아오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라는 ego를 만들며 살아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ego가 자신 Self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ego와 Self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ego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이것이 바로 참자신이 Self가 될 수는 없다. ego는 목표 지향적이고, 이기적이고, 타인과 경쟁하고 비교하며 우위에 서려고 한다. 비교는 결국 비참함으로 끝을 맺는다. 우월감을 느끼려는 마음도 결국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두 가지 모두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ego는 Doing Mode의 삶을 추구한다. 늘 행동하고 비교하고 성취를 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다. 자신의 ego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꼴이다. 결코 만족을 모르고 늘 결핍에 시달리며 불안과 불편함과 불만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된다.    

  

반면 Self는 참자신이다. 비교를 할 필요조차 없고 존재 그 자체가 이미 완벽하다. 더 이상 완전함이나 만족을 추구할 필요조차 없다. 비교를 하지 않고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우리는 하나라는 세상을 이루며 늘 평온함 속에서 살아간다. Self는 Being Mode의 삶이다. 이미 완벽하고 모든 것이 충만한 삶이다. 굳이 무언가를 추구한다면 이는 맨 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다. 주변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바로 나의 것이 된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너와 나의 구별이 사라진 오직 하나의 우주만 존재한다. 그리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심하게 살아갈 뿐이다. 굳이 힘들여 살 필요가 사라진 모든 것이 충만한 삶이다.      

 

Self를 찾기 위해서 ego를 죽여야 한다. Self는 ego라는 놈이 감싸고 있다. 그리고 ego는 Self의 눈을 가리며 Self가 본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ego가 우리의 참모습이라며 세뇌를 시킨다. 이 ego가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이 바로 Self를 찾을 수 있는 순간이다. ego가 드러날 때 그 ego를 죽이면 Self는 저절로 그 모습이 드러난다. ego를 죽이는 작업이 바로 Self를 되찾는 작업이다. ego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남을 비난하고 싶어 하고, 자신의 힘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려는 못된 언행과 태도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마음이 올라올 때 빨리 알아차리면 ego는 저절로 사라진다. ego라는 어두운 어리석음은 알아차림이라는 빛이 발하는 순간 사라진다. 굳이 ego를 몰아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자신의 언행을 잘 관찰하면 된다. 언행을 관찰하는 행위가 바로 마음챙김이다.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주변 사람에 대한 비난과 불평을 하고,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타인에게 시키거나 미루는 행위와 태도를 마음챙김을 통해 알아차리면 그런 언행을 멈추게 된다. 멈추는 순간 ego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자연스럽게 Self가 본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오랜 기간 ego가 Self를 둘러싸고 있어서 Self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며 살아오느라 ego를 Self로 동일시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탈동일시를 해야 할 때이다. 탈동일시를 하는 방법이 바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다. 마음챙김은 자신이 하는 언행과 태도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지켜보는 것이고, 지켜보며 ego가 모습을 드러낼 때 알아차림을 통해 ego를 사라지게 만들어 Self가 본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만들 수 있다.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과 상황을 통해 우리는 ego를 볼 수 있고, ego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Self를 찾는 것과 동일하다는 의미다. ego는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ego가 사라지면 바로 그 자리에 Self가 본모습을 드러낸다. 길벗의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과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에 속지 말고, 그것이 자신의 ego라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ego의 심부름꾼이 되지 말고 Self로 살아가면 된다. 상황과 마주칠 때 올라오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에 속지 말고 그 상황이 Self를 찾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스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번뇌가 깨달음이라고 한다. 번뇌가 깨달음의 바탕이 된다. 마주치는 사람과 상황에서 불편함이 올라온다면 바로 그것이 번뇌가 되고, 불편함을 알아차리면 바로 깨달음이 된다. Self를 찾는 방법이다. 이 글을 쓰며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된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반복될 것이다. 자신의 ego를 통해 Self를 찾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게 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반복을 통해 조금씩 Self에 다가갈 수 있다. 길벗과 함께 걷는 것은 ego를 Self로 변환시키는 수행의 과정이고, 길은 마음수련장이 되고, 길벗과 상황은 스승이 된다. 우리가 마음챙김 걷기를 하는 이유다.

 

 

 

 

728x90

'걷고의 걷기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  (4) 2024.10.07
비우기  (9) 2024.10.06
<어깨 통증이 준 교훈>  (3) 2024.10.03
우리는 우주라는 퍼즐의 한 조각이다  (1) 2024.10.02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9) 2024.10.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