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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재심리상담센터

습관의 무서움

by 걷고 2024. 1. 20.

 오늘 신문 한 칼럼에 나온 내용이다. 망자(亡子)들이 삼도천을 건너기 위해 나루터에서 기다리고 있다. 각자 노잣돈을 들고 있다. 삼도천은 망자들이 건너야 할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냇물이다. 노잣돈은 망자들이 저승길을 가는데 쓰라고 자식과 가족, 친척들이 주는 돈이다. 죽어서도 돈은 필요한 가 보다. 예전에 한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다. 어지간히 구두쇠로 살아온 꽤 돈이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그 집 친척 중 한 사람이 500원 동전을 입에 물려주며 돈이 많아도 갖고 가지도 못하는데 왜 그렇게 구두쇠로 살았느냐고 원망했다는 얘기다. 오늘 읽은 칼럼에서도 망자들은 모두 평등하게 단지 손에 쥘 정도의 노잣돈만 들고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재력과 권력을 갖고 살아왔던 사람인지,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니며 살아왔는지 알 길이 없다. 단지 그들은 모두 나룻가에서 삼도천을 건너기 위해 노잣돈을 들고 있는 한 무리의 망자들이다.      

 

  망자 중 한 사람이 노름꾼이었다. 그 노름꾼이 망자들에게 노잣돈으로 노름을 하자고 제안하고 모두 딴 사람이 한 푼의 노잣돈을 개평으로 나눠주기로 합의한 후 시작했다. 결국 그 노름꾼이 돈을 모두 따자, 다른 망자들이 돈을 빼앗기 위해 싸우며 난리가 나는 상황이 발생했다. 죽어서도 서로 빼앗고 빼앗기고 싸우며 지낸다. 저승사자가 노름꾼이 딴 돈이니 그의 돈이라며 중재를 한다. 노름꾼은 배 삯으로 한 푼씩 나눠주고, 그 돈으로 모두 삼도천을 건너는 배에 올라타서 저승 나루터에 도착했다. 한 푼씩 낸 사람은 모두 나루터에서 내리고, 돈을 많이 갖고 있는 노름꾼 망자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저승 속 깊은 곳까지 계속 가야만 한다고 저승사자가 명령을 내린다. 돈을 모두 버리려 하지만 돈이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 결국 홀로 더 멀고 깊은 곳 여정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글을 읽으며 습관의 무서움을 느낀다. 좋은 습관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나쁜 습관은 부정적으로 변화시킨다. 물론 긍정과 부정에 대한 개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차이는 매우 미미할 것이다. 사람의 습관은 행동이 만들고, 행동은 생각이 만든다. 생각은 마음이 만들고, 마음은 자신의 업이 만든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같은 세상이자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에 사람 수만큼 다양한 세상이 존재한다. 과거생의 수많은 업이 쌓여 자신의 관점이 되고, 그 관점이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든다. 즉 자기가 만든 세상, 또는 자신이 겪는 세상은 모두 자기 스스로 만든 세상이다. 습관은 업(業)의 드러남이다. 우리가 느끼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느낌은 업보(業報)다. 저승길 노름꾼이 돈을 버리고 싶어도 몸에서 떨어지지 않아 혼자 저승 속 깊은 세상을 떠다니듯, 업보는 쉽게 우리와 떨어지지 않는다. 즉 우리는 자신이 만든 업에 의한 업보를 받으며 그 세상 속에서 울고 웃고 살아간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보림(保任) 기간을 갖는 이유도 바로 이 남은 업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에 경허선사의 기행이 나온다. 경허선사의 언행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 것은 매우 발칙한 짓임에도 나의 단견으로는 전생의 남은 숙업을 제거하지 못한 행동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경허선사의 기행은 유위행이 아니고 무위행이다. 깨달음을 증득한 선사가 하는 행동은 그냥 무의미한 습관의 관성일 뿐, 어떤 개인적인 의도나 목적을 갖고 하는 이기적인 언행과는 완전히 다르다. 단지 습관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습관은 목적과 이유가 있다. 그 이면에는 ‘자기’라는 아상(我相)과 ‘자기’를 지키려는 ‘이기심’이 뿌리내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언행은 유위행에 불과하다. 설사 같은 언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을 증득한 선사가 하는 것과 우리가 하는 것과는 천지간의 격차만큼 그 차이가 매우 크다.  

    

 나에게는 술을 좋아하는 습관이 있고 이성에 대한 끌림도 있다. 돈에 대한 욕심도 있고, 명예를 얻고자 하는 욕심도 있다. 온갖 나쁜 습관은 모두 갖고 있다. 또 이런 욕심이 그간 살아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욕심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좌절을 경험하며 ‘나’를 직시할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된 것은 그나마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냥 한 명의 매우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의 틀을 벗어나 사회와 인류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그릇도 아니다. 그냥 겨우 나와 우리 가족의 평안 정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매우 작은 그릇일 뿐이다. 이 그릇을 깨지 않고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쓰며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면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안쓰럽기도 하다. 반면 그래도 그릇을 깨지 않고 유지하고 관리하며 살아왔다니 매우 다행스럽기도 하다.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자신의 그릇 크기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욕심은 저절로 버리게 된다. 내려놓은 것이 아니고 이룰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또 갖고 있어 봐야 괴롭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욕심을 추구하기 위해 쏟았던 정열과 시간을 자신의 내면을 가꾸는데 활용하며 ‘욕심 추구’에서 ‘마음의 평안 추구’로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오늘 읽었던 칼럼 내용 중 돈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아 홀로 저승 속 깊은 곳을 홀로 돌아다녀야만 한다는 내용이 매우 끔찍하게 와닿는다. 나의 나쁜 습관도 여전히 내 몸과 마음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막걸리 한 잔 하며 이 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 술 마시고 싶은 습관의 힘을 글 쓰는 습관의 힘으로 누르며 글을 쓰고 있다. 나쁜 습관은 익히기 쉽고, 좋은 습관은 만들기 어렵다. 좋은 습관의 쉽게 나쁜 습관으로 변할 수 있지만, 나쁜 습관의 좋은 습관으로 변하기 무척 힘들다. 참 이상한 일이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좋은 습관은 들이기 힘들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나쁜 습관은 없애기 어렵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을 수 있고 나만 그럴 수도 있다. 그간 살아온 업이 만든 것에 불과할 뿐이다. 다만 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만 하지 않으면 된다. 업은 내가 그간 살아오며 지은 언행과 사고의 결과물이고, 나는 ‘나’다. 나의 주인공이 나의 업이 아님에도 업에 끌려 다니며 살아가고 있다. ‘업’은 종이고, ‘나’는 주인이다. 그런데 실상은 주종이 바뀐 꼴로 살아가고 있다. 업에 끌려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무척 안타깝고 불쌍하고 안쓰럽다.      

 

 지금 읽고 있는 책 <깨달음 그리고 지혜, Keys To The Ultimate Freedom, 레스트 레븐슨  지음> 에서 나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나온다. 오랜 기간 머리로만 알아온 내용이지만,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이 세상의 실재는 세상 뒤에 있는 존재. 당신의 진정한 존재는 변함없는 스크린이고, 이 세상은 그 위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쇼.” 이 글이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 열쇠다. 불교의 화두와 같다. 업에 끌려 다닐 때 그것이 허상(虛想) 임을 알아차리면 된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거울이 아니듯, 허상은 잡고 있지 않으면 금방 사라진다. 집중과 알아차림으로 자신의 주인인 거울을 되찾을 수 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경구(經口)가 떠오른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모든 세상사는 일어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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