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벽안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다. 다행히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수술을 잘 마쳤고, 지금 회복실에서 지낸다. 가까운 친구의 암 소식을 듣고 모두 망연자실했다. 늘 씩씩하고 건강한 친구였는데, 그 소식은 우리를 모두 놀라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간 덕을 많이 베풀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어제 아침 8시에 수술실에 들어가서 15시간 이상 수술을 받았다. 본인도 의사도 가족에게도 모두 힘든 일이다. 가까운 지인들도 모두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 친구와 특별히 가까운 두 명의 친구들에게 병원 주변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식사 잘 챙겨 먹으라고 얘기했다. 수술 시간 내내 병원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딸네 머물다 아내와 함께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10시 반경 잠에 들었고 새벽 3시 반에 기상해서 나갈 준비를 한다. 이미 배낭은 모두 꾸려놓은 상태다. 딸네에서 아내가 하는 일을 보면 가끔 화가 나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챙기지 않고 손주들 챙기고 아이들 식사준비하고 장 보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다. 몸 상할까 걱정이다. 목요일 밤늦게 집에 오면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해방이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가 깨지 않게 조심해서 움직인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시간 알람을 해 놓고 내가 일어나는 새벽 3시 반에 깨어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냥 자라고 하고 간단히 씻은 후 아내가 어젯밤에 준비해 놓은 떡 세 쪽을 과일과 함께 먹고 나갈 준비를 한다. 동작을 빨리 움직인다고 서둘러도 나갈 준비를 하는데 1시간이 걸린다. 4시 반에 택시를 불러 서울역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도 남파랑길 가는 설렘도 느끼지만 자꾸 친구 생각이 떠오른다. 친구 생각이 떠오르면 그 순간 잠시 그 친구의 성공적인 수술과 빠른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한다. 택시가 잠시 멈춘 사이 옆에 과일과 야채를 가득 실은 트럭이 보인다. 새벽 장사를 나가는 모습이다. 친구는 암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나는 남파랑길을 걸으러 택시 타고 나가고 있고, 과일 장수 아저씨는 새벽바람을 맞으며 장사를 나가고 있다. 순간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잊힌 느낌이 든다. 두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있고, 도시는 파괴되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지구는 파괴되고 있다. 최근에 본 기사에는 해양오염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세계는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고,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 특히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도 오직 자신의 이익과 권력유지에만 정신 팔린 정신 나간 사람들도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이익에만 정신 팔려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나 역시 이 정신 사나운 세상 속에서 나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남파랑길을 걷는다. 오늘 걸은 남파랑길 8코스는 아름다운 길이고 걷기 편안한 길이다. 주로 임도로 이루어져 있어서 완만한 경사는 있지만 걷기에는 아주 멋진 길이다. 길 좌편에는 바다가 보인다. 우측에는 산이 보이고 길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바람이 제법 불지만 춥기보다는 시원한 바람이다. 아직도 단풍을 볼 수 있는 것도 신기하다. 이 길은 정비가 참 잘 되어 있다. 약 2,3km마다 화장실이 있고, 중간에 정자를 만들어 놓아 쉴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어떤 계절이든 또 누구와 오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멋진 길이다.
걷는 중간중간 수술대에 누워있는 친구 생각이 떠오른다. 전쟁도 떠오르고, 지구 오염 걱정도 한다. 그리고 금방 잊고 다시 걸으며 길동무들과 즐거운 수다를 떨며 간식을 나눠먹고 있다. 오늘 밤에는 저녁 식사를 하며 술도 한잔 할 것이다. 이런 나의 모습은 과연 정상적일까? 친구의 암도, 지구 내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지구의 몸살도 마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듯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한심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나?라는 자신에 대한 반감도 올라온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방편인지는 몰라도 친구의 회복과 지구의 회복, 그리고 전쟁의 종식을 위한 기도를 잠시 한다. 그리고 다시 걸으며 생각 없이 떠들고 웃는다. 이런 나의 모습이 마치 미친놈 같다. 나의 역할이 무엇일까?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잘 모르겠다.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것 같다. 실제로 내가 뭔가를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고 속 상하다.
지구는 지구의 모습대로 살아간다. 친구는 친구의 삶을 살아간다. 각 나라는 나라 대로 살아간다. 나는 나대로 살아간다. 지구를 포함한 모든 유정, 무정은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이 있다. 그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순간적으로 바꿀 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운명을 바꾼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 외에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다. 지구와 우리, 너와 나, 이 나라와 저 나라 모두 연결된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자신만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안달한다. 그리고 그 업보를 고스란히 받는다. 나도 한심한 존재지만 우리 모두 참 불쌍한 존재들이다. 서로를 해하지 않고 화합하며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넓게 크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자위의 수단일 수도 있고,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고, 이기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떡하랴?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노력부터 하려 한다. 나 스스로 판단할 때 그다지 친절하거나 따뜻한 사람이 아니다. 며칠 전 친구들과 남한산성을 다녀왔다. 길 안내를 하는 선배가 먼저 지하철역에 도착한 후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난 것을 확인한 후 다른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역사 내부를 열심히 다니며 그 내용을 모든 참석자들에게 카톡으로 알려주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나라면 과연 그렇게 했을까? 나는 남한산성역 2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냥 2번 출구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려고 하면 못할 일도 아닌데, 남을 위해 이런 사소한 수고 조차 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 선배의 모습을 보며 나는 친절한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우선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내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친구의 빠른 건강 회복, 전쟁의 종식, 사람들 마음 속에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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