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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에관하여

걷기 중독

by 걷고 2023. 11. 21.

중독에는 두 가지 대표적 증상이 있다. 금단과 내성이다. 금단은 물질이나 행동의 강박적 사용 행동, 즉 자극을 중단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증상을 의미한다. 내성은 종전과 같은 만족을 경험하려면 더 강도가 세거나 지속 시간이 긴 자극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가지 모두 종전의 경험을 충족시키기 위한 강박적 증상이다. 중독의 사전적 의미는 세 가지가 있다. 신체적 증상, 심리적 증상, 그리고 사상적 증상이다.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신체적 증상이 있다. 강박적 물질 남용과 행동으로 인해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심리적 증상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떤 사상에 젖어 정상적으로 상황 판단을 할 수 없는 사상적 증상이 있다. 나는 이 외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걷기 중독’이다.      

 

‘걷기 중독’은 일반적 증상인 금단과 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걷지 않는다고 고통스러운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니 금단 증상이 없다. 예전에 느꼈던 행복감은 충족하기 위해 더 멀리, 더 빨리, 더 높은 곳으로, 더 오래 걷지 않아도 되니 금단 증상이 없다. 게다가 ‘걷기 중독’이라는 단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걷기 행복’은 있을지언정 ‘걷기 중독’은 없다. 하지만, 나는 가끔 걷지 못해 발생하는 금단 증상과 내성 증상을 느낀다. 중독에 빠진 것이다. 걷지 않으면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한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몸이 걸으라고 뇌에게 명령을 한다. 나도 모르게 마치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나가서 걷기도 한다. 이런 경우 한 시간 정도 걷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을 걷는다. 그리고 돌아온 후 씻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가끔은 집 주변을 떠나 조금 멀리 색다른 길을 찾아 나서야 성에 차는 경우도 있다. 늘 다니던 집 뒷산인 봉산, 서울 둘레길, 또는 딸네 집 근처인 올림픽 공원을 걷는 것만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걷기 중독’ 증상의 하나인 ‘걷기 갈증’을 느낀다. 그럴 때에는 지방에 있는 길을 찾아 나선다.      

 

경기 둘레길을 마치고 잠시 걷기 동호회 활동을 쉬고 있다. 딱히 쉴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잠시 거리 두기를 하고 싶었다. 약 12년간 활동하며 익숙해진 나의 모습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흔히 얘기하는 매너리즘인가? 잘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매너리즘은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활동으로 인해 자극이 없는 약간은 무기력하고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걷기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느끼는 매너리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회원들을 대하는 습관적인 태도가 그 하나가 될 수 있다. 늘 만나는 반가운 사람임에도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길 안내자 역할을 하면서 혹시나 안내자라는 완장이 주는 재미나 약간의 권위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에 대한 반성하는 마음도 있다.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불호를 느끼며 나의 편견에 대한 회의도 들었다.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나 판단을 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도 있다. 무엇보다 큰 것은 동호회 활동을 그냥 잠시 쉬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조금 지친 것 같기도 하고, 제법 오랜 기간 가깝게 지내온 동호회 활동과 편안한 거리 두기를 하고 싶었다. 이런 거리 두기를 통해서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활동을 쉰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중독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 증상으로는 무기력이 있다. 친밀한 대화와 즐거운 웃음이 사라져 버려 활력이 많이 떨어진 느낌이다. 또한 사람들 속에 늘 있다가 홀로 떨어진 소외감도 느낀다. 혼자 걷는 것도 좋아하는 편인데도 혼자 걸으면 신나는 느낌이 별로 없다. 그냥 혼자 조용히 걷는 약간의 편안함 그 이상은 없다. 마음공부는 ‘설익은 것을 익게 하고, 익은 것을 설익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록 지금 약간의 무기력과 외로움을 느끼고는 있지만, 이 또한 나의 익숙한 모습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증상이다. 금단과 내성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표이다. 조금은 더 이 상황을 버티고 견디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삶의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얼마 전 아내가 해외여행을 다녀온 기간 동안 남파랑길을 걸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남파랑길을 걷고 싶었다. 며칠간 걸으며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행복했고, 때로는 외로웠다. 삼일 째 되는 날 너무 외로워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싶었다. 갑자기 찾아온 외로움은 채 손쓸 틈도 없이 나를 세차게 몰아붙였다. 혼자 걷는 즐거움과 외로움을 공유할 수 있는 길동무인 도니 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인들과 식사 중인 것 같아 빨리 끊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외로움은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느낀 강렬했지만 금방 수그러드는 외로움을 보며 감정의 무상함도 잠시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도니 님이 전화를 해서 빨리 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며 한참 통화를 했다. 참 고마운 친구다.      

 

아내는 내가 장기간 집을 떠나는 것도 싫어하고 혼자 걷는 것도 싫어한다.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앞으로 혼자 걷지 않는다면 매월 2박 3일간 도보 여행을 허락해 주겠다는 통 큰 하사품을 내리셨다. 감읍할 따름이다. 이제 매월 2박 3일간의 자유를 얻었다.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가 그간 집에서 감금당했다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나는 집 안이나 밖에서도 언재든 즐겁고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함께 있는 것도 좋아한다. 최근에 안 사실 중 하나는 홀로 있는 것을 조금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물론 외로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이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잘 어울리기 위한 초석이 된다.      

 

걷기 동호회에서 피치님이 남파랑길을 앞으로 진행하겠다고 한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함께 걷는 길동무가 있으니 아내의 조건을 충족시킨 것이다. 함께 걸으며 외로움에서 벗어나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함박웃음을 지을 수도 있다. 함께 걷지만 조금 뒤처져 혼자 조용히 걸으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혼자 걸으면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장거리 프로젝트를 피치님이 매월 진행해 주니 끝까지 완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경기둘레길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안내자가 되어 자신의 발에 족쇄를 걸었고, 참석자들 덕분에 완보를 한 후 자연스럽게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피치님이 안내자 역할을 하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 또한 매우 고맙고 편하다. 나는 뒤에서 걸으며 후미를 맡아 피치님의 힘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원래 나는 리더 역할이 아닌 후미 역할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내 역할을 다시 찾았고, 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동호회와의 잠깐 거리 두기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왜 걷는가? 나는 왜 걷는가? 늘 자신에게 던져 온 질문이다.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 열자는 “어딘가를 걷는 일의 즐거움은 바로 목적 없음을 향유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철학자의 걷기 수업’ 본문 내용 중) 우리는 늘 어떤 목적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한다. 목적을 향한 행동모드(Doing Mode)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참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존재모드(Being Mode)의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다. 서울에서 벗어나는 물리적 거리의 거리 두기도 필요하다. 걷기를 통해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상과의 거리 두기도 필요하다. 걷기를 통한 거리 두기는 일상에서 벗어나 존재모드의 삶으로 환원시키기 위한 매우 중요한 방편이다. 남파랑길을 걸으며 일상과 어떤 목적에서 벗어나 조금 더 존재모드의 삶으로 돌아가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피치님, 남파랑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많은 회원들도 동참하셔서 ‘일상과 목적 중독’에서 벗어나 ‘걷기 중독’에 함께 빠져 보길 마음 모아 기원한다. 남파랑길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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