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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둘레길

아는 게 병이다

by 걷고 2023. 6. 18.

폭염 주의보가 있는 날이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에 걷기 위해 집을 나선다. 8시에 합정역에 모이기로 했는데 7시 반 경에 도착하니 벌써 와 있는 길동무들이 있다. 잠이 적은 우리 또래 친구들이다. 또래 친구들이 주는 편안함과 즐거움이 있다. 지난번에 걸었던 도착 지점이 오늘은 출발지점이 된다. 길 가에 세워진 스탬프함과 지도판을 보니 반갑다. 한번 만난 인연이 만들어 주는 반가움이다. 사람, 길, 스탬프함, 지도 등 한번 만나면 금방 친숙해지고 정이 든다. 길도 정이 든다. 한번 갔던 길을 다시 가면 길이 편안하고 반갑다. 길도 우리를 반긴다.     

 

 블로그를 통해 오늘 걷는 길인 경기 둘레길 24코스에 대한 검색을 여러 번 반복해서 했다. 매우 힘든 길로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는 글이 많다. 경사가 심해서 오르기 힘들고 하산 시에도 경사가 심해서 다칠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글이 많다. 걱정을 안고 걷기를 시작한다. 햇빛을 가릴 수 없는 길을 지나 산길에 들어서니 시원한 그늘이 몸과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발걸음도 가볍고 산새들이 노랫소리로 우리를 반긴다. 운곡암 일주문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고, 흘러나오는 예불 소리는 매우 맑고 깊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조금 더 걸어가자 오르막이 시작된다. 경사가 60도 정도 되는 급한 오르막길이다. 이 길은 아직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지 경기 둘레길 안내 리본도 잘 보이지 않는다. 흙길이어서 미끄러지기 일쑤다. 만약 비 오는 날이나 폭설이 내린 날에 이 길을 걸었다면 오르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르막 마지막 중간에는 로프가 있기도 하고 마지막 깔딱 고개는 아직 공사 중인지 로프를 설치할 봉만 박혀있다. 다행스럽게 봉은 매우 튼튼하게 박혀 있어서 봉을 잡고 오른다. 오르막의 경사도는 내리막의 경사도를 가늠케 한다. 역시 로프 설치 공사를 하고 있는데 로프는 보이지 않고 봉만 보인다. 봉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임도에 접어들면서 멋진 길이 펼쳐진다. 우리 외에 걷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이 무더운 날씨에 이곳까지 찾아와서 걷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우리도 이상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혼자라며 못 할 일을 함께 하니 할 수 있다.      

 

 며칠 전부터 블로그 검색을 하며 걱정이 시작되었다. 12명이 함께 걷는데 날씨도 무덥고 경사가 심한 힘든 코스다. 혹시나 발생할 사고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아무리 블로그를 뒤져 봐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글은 보이지 않고, 힘들다는 글만 보인다. 혼자 걷지 말고 여러 명이 함께 걸어야 한다. 길 헤매기 일쑤니 정신 차리고 걸어야 한다. 길 정비가 덜 되어 있으니 신경 써서 걸어야 한다는 등 불안한 글만 가득하다. 더 이상 블로그를 보는 것이 의미가 없어서 대안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걷는 순서를 어떻게 하고 힘든 길동무를 챙겨 줄 수 있는 잘 걷는 사람에게 어떻게 부탁을 해야 할까? 혹시나 길을 잃을 것에 대비해서 길을 잘 찾는 길동무를 앞에 세워야 하나 등 고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에단호크 님에게 길잡이 역할을 부탁드렸다. 어니님에게 후미를 부탁드렸다. 주산님에게 중간에서 걸으며 앞뒤 간격이 너무 떨어지지 않게 조율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당근조아님과 주니유니님에게 스마일영님을 옆에서 챙겨달라고 부탁드렸다. 모두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셨고, 맡으신 역할을 훌륭하게 해 주셔서 아무런 사고 없이 길을 마칠 수 있었다. 수고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걷기를 마친 후 사자성어 하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식자우환(識字憂患). 아는 게 많으면 걱정이 많다는 의미다. 블로그를 읽으며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 단어가 떠올랐다. 이 길을 걷기 위해 블로그를 보지 않았다면 과연 결과가 달라졌을까? 검색하지 않았다면 무슨 사고가 발생하기라도 했을까? 아니다! 사전 검색을 하든 않든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현장에서 마주치는 여러 상황들을 함께 지혜롭게 풀어나가며 즐겁게 걸었을 것이다. 길 안내자라는 역할이 주는 부담 때문에 검색을 해 보긴 했지만, 검색하든 않든 결과는 전혀 달라질 게 없다. 오히려 검색한 것이 걱정만 키울 꼴이다.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길이 험하든 편하든, 걷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니 그냥 걸으면 된다. 힘든 길을 힘들게 걸으면 되고, 쉬운 길은 편안하게 걸으면 될 뿐이다. 힘든 길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힘든 길이 쉬운 길이 될 리도 없다. 이미 걷기에 익숙한 길동무들이니 각자 날씨도 챙겨보며 걸을 길에 대한 정보도 확인한 후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 올 것이다. 각자 자신의 몸 상태와 코스를 확인하고 신청한 길동무들이다. 오히려 나의 걱정이 길동무들의 불안을 야기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다. 앞일을 미리 안다고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걱정만 키울 뿐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고,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주어진 길을, 주어진 삶을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가면 될 뿐이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어진 길이나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뿐이다. 이 시각의 변화로 지옥이 천당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성립될 수 있다. 어차피 주어진 길이고 삶이라면 힘들다고 불평한다고 바뀌지도 않을 것이며, 가기 싫다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냥 주어진 길을 또는 삶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가는 것 외에는. 미리 앞서서 걱정을 한다고 바뀌는 것이 없는데 걱정을 앞당겨할 필요도 없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무의미한 희망만 기다리며 현재를 무시하고 산다면 이 또한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앞 일이 좋은 일이든 또는 나쁜 일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삶을 수용하며 그냥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씀을 길에서 체득할 수 있는 좋은 날이다.

 

 남아있는 경기 둘레길은 총 7개 코스로 5회에 걸쳐 진행할 계획이다. 이제는 블로그를 찾아보거나 하는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가야 할 길이고, 주어진 길이니 그냥 걸을 것이다. 날씨를 검색해 보며 필요한 준비물을 챙기기는 하겠지만 걷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날에는 그냥 묵묵히 걸을 것이다. 날씨를 따지고 가려가며 걸을 수도 없고, 따진다고 날씨가 변화되지도 않는다. 우리네 삶의 날씨도 시시각각 변한다. 결국 모든 것은 무상이다. 무상을 알게 되면 무상에 맞는 삶의 태도를 취하면 된다. 모든 것은 변하니 더운 날씨는 시원해지거나 추워질 것이고, 힘든 길 뒤에는 쉬운 길이 반길 것이다. 무상은 희망의 단어다. 만약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어짐으로 인해 삶은 무료하고 우리는 무기력 상태에서 살게 될 것이다. 무상은 활력이다.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우리는 무상을 배운다. 우리가 걷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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