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린 후의 날씨는 아주 쾌적하고 청명하다. 전철 안에는 등산객들과 자전거족으로 붐빈다. 오랜만에 맞이한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각자 좋아하는 방식으로 주말을 맞이한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시원한 날씨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주말을 즐기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우리는 걷기 위해 떠난다. 일주일의 스트레스를 떨쳐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한 주를 활기차게 살기 위해 걷는다. ‘떠남’은 ‘돌아옴’을 의미한다. 정해진 안정적인 가정이 있기에 떠날 수 있고, 이 ‘떠남’은 ‘돌아옴’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만약 돌아올 곳이 없다면 ‘떠남’은 ‘떠남’이 아닌 ‘방황’이 된다. 어딘가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은 삶의 안식처가 있다는 의미고, 삶의 안식처는 살아가는 힘이 된다.
나에게는 두 가지의 삶의 안식처가 있다. ‘가정’과 ‘걷기’다. ‘가정’은 살아가는 동기가 되고, 삶의 의미가 되고, 나와 가족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물론 가정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힘든 일을 감수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지만, 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 ‘걷기’는 심신의 건강을 지켜주는 안식처다. 길을 걷는 것이 힘들 때도 있지만 힘든 상황은 신체와 정신을 단련시켜 준다. 스트레스 연구로 노벨 의학상을 수상 받은 한스 셀리에 교수는 ‘만약 우리에게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면 무기력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라는 말을 했다. 스트레스는 우리를 힘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삶의 동력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그는 스트레스는 상황이 만들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고, 삶이 고통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한다. 결국 스트레스는 상황에 대한 대처 방식에 따라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올 수 있다.
상황에 대한 해석은 과거의 경험과 간접경험, 평상시의 생각, 말투, 행동 등이 바탕이 된다. 각자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생각과 언행의 패턴이 다르기에 한 가지 상황에 대한 반응이 각양각색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황에 대한 좋은 감정과 불쾌한 감정을 외부 탓으로 돌리며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기도 한다. 너 때문에, 네가 저지른 행동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아서, 싫어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남과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는 등 힘든 이유를 자신 외의 외부 요인에서 찾고, 찾으려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며, 비난을 한다. 그로 인해 더욱 심한 스트레스와 비난이나 불만에 익숙해지는 부정적인 태도가 굳어져서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진다.
반면에 외부 요인에서 찾는 습관을 또는 관점을 자신의 내부로 돌리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람과 상황에 대한 관점을 자신의 내부로 돌려서 찾게 되면 불만과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미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고,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마음을 돌아보면 자신 내부에서 실수의 요인을 찾을 수 있고, 그 실수는 삶의 경험으로 녹아나 같은 실수를 예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타인에 대한 비난과 험담 대신에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득하게 된다. 외부 상황과 타인에 대한 비난만 멈출 수 있어서 삶은 한결 편안해진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있다. 나의 방식이 옳고, 너의 태도는 틀리다. 나의 생각과 결정은 옳고 너의 것은 옳지 않다는 방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유는 자신이 편해지고 싶어서인데, 오히려 이련 이분법적 태도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가평에서 만나 택시로 용추계곡 버스 종점으로 이동해서 걷기 시작한다. 용추계곡은 길 안내자인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준 곳이다. 비 오는 날 걸었던 이 길에 대한 기억을 복기하며 걷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무 사고 없이 이 길을 걸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 또한 힘들게 걸었던 길동무들에게 미안함이 가득하다. 미안함과 고마움은 과거의 기억이지만, 이 기억은 앞으로 길 안내자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거름이 된다. 2주 전의 이 길은 걷기 힘든 길이었지만, 오늘 걷는 이 길은 너무 멋진 길이다. 같은 길도 누구와 걷고, 어떤 날씨에 걷고, 자신의 심신 상태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길이 된다. 우리를 힘들거나 즐겁게 만드는 것은 길이 아니고 자신의 상황, 생각, 태도, 마음가짐 등이 만든다. 계곡에서 흐르는 시원한 물과 물소리는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아름다운 새소리는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들어주고, 짙은 연두색의 숲길은 활력을 만들어준다. 숲길을 벗어나면 도로를 걷거나 개천을 바라보며 걷는다. 비록 햇빛 가릴 곳이 없긴 하지만, 단순하면서도 결코 지루하지 않은 길이다.
네 명이 단출하게 걸으니 움직임이 가볍다. 쉬는 시간도 별로 갖지 않고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걷는다. 예상보다 빨리 가평역에 도착했다. 용추계곡에서 가평역까지 걷는 길은 아침에 택시로 이동했던 길을 되돌아오는 길이다. 택시로 불과 2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약 3시간 이상 걸어서 돌아왔다. 왜 이런 우스운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걷는다. 우리는 걷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가평역에서 스탬프를 찍고 상천역을 향해 걷는다. 중간에 중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며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신다. 땀을 흘린 후 마시는 맥주의 첫 잔은 늘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가 나가자마자 식당 주인은 ‘오늘 영업 종료’라는 간판을 식당 앞에 내놓는다. 오늘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라고 했다. 그 가족의 화목한 모습이 보기 좋다. 중식당 가족의 행복을 기원한다.
상천역에 도착하니 오후 3시 20분.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서 경춘선을 타고 이동 후 상봉역에서 가볍게 뒤풀이하기로 결정한 후 약 20분 정도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린다. 자전거족이 우르르 플랫폼으로 들어온다. 그들도 오늘 하루 라이딩을 즐긴 후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도 정겹게 들린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고 우리는 온몸으로 길 위를 걷는다. 그들이 70km를 걷는 것보다 우리가 20km를 걷는 것이 더 힘들고 운동도 많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며 함께 웃는다. 상봉역에서 뒤풀이를 하며 지난번에 힘들게 걸었던 연인산 얘기를 한다. 힘든 기억만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힘든 기억보다 좋은 추억만 간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힘든 기억은 나누며 옅어지고, 좋은 기억은 나누며 진해진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기억들이 모여 추억이 된다.
한스 셀리에 교수가 고별 강연을 하버드 대학에서 하는데 학생 중 한 명이 말했다. “선생님,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비결을 한 가지로 요약해 주세요.” 교수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단 한 단어로 ‘Appreciation! (감사)’라고 대답했다. 감사가 스트레스의 가장 강력한 정화제라는 것이다. 어제의 또 과거의 모든 일에 매몰되기보다는 그 상황 속에서 감사함을 찾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스트레스를 정화하는 것이 삶의 지혜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삶의 지혜를 체득한다. 그간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수많은 상황들이 발생했고, 그 상황들을 즐기거나 극복하며 걸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걸었고, 앞으로도 잘 걷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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