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코스와 55코스 일부를 걷는 날이다. 아침부터 몸이 무겁다. 일상 속 특별한 변화가 없는데 이상할 정도로 몸이 무겁다. 몸이 무겁다고 안 걸을 수도 없다. 더군다나 길 안내자로서 공지를 올리고 참석자가 있는 상태에서 엄살을 피울 수도 없는 상황이다. 걸으며 몸을 관리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가끔 심신이 피곤할 때 걸으며 회복했던 경험 덕분에 걸으면 몸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걷는다. 아침 날씨는 제법 쌀쌀하다. 시흥 연꽃 테마 파크에서 걷기 시작한다. 넓은 평원을 걷는다. 주변 경작지에는 서리가 가득하다. 마치 눈이 온 듯 온 세상이 하얗다. 해뜨기 시작하며 하얀 서리가 자취를 감춘다. 서리가 몸의 무거움이라면 시간이 흐르며 서리가 녹듯 몸도 녹듯이 이완된다. 어쩌면 그런 마음을 갖도록 자신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길 안내자라는 책임감이 주는 무게가 몸을 저절로 가볍게 만들 수도 있다. 대신 책임감의 무게는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길 안내자로 자신을 돌아본다. 과연 나는 길 안내자로 책임감을 느끼며 걷고 있는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책임감을 많이 느끼고 있지는 않다. 다만 가장 기본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참석자의 안전이다. 누군가가 길 위에서 다친다면 길 안내자로서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출발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안전에 최우선을 두고 있다. 누군가의 실수로 다칠 수도 있고, 자신의 실수로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고, 길이 험해서 위험과 마주칠 수도 있다. 참석자의 안전에 대한 책임감이라면 제법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감을 생각하다 보니 자격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된다. 길 안내자로서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 또 반드시 자격이 있어야만 길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걷기 동호회 길 안내자의 역할이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장기 고난도 산행의 대장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격을 걷기 동호회인 걷기 마당의 규정과 조직도에 명시되어 있는 정의를 통해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비영리 카페로 개인의 이익과 영리를 연관하거나 추구하지 않으며 회원들 간의 친목과 건강, 행복 그리고 건전한 교류를 지향하는 우리 모두의 걷기 마당이다.” (걷기 마당 규정과 조직도) 이 정의에 의하면 걷기 마당의 목적은 친목, 건강, 행복과 교류이다. 따라서 길 안내자는 자신과 회원들의 건강, 행복, 친목 도모 및 건전한 교류를 위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자격을 갖추는 것과 실제 길 안내자로 활동하는 것은 별개의 얘기다.
우선 길을 잘 알고 잘 이끌어야 한다는 조항이 없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길눈이 어둡고 지도를 보고 걸어도 늘 다른 곳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스스로 멍청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다행스럽게 길을 잘 알아야 된다는 조항이 없으니 자격은 일단 된다고 본다. 경기 둘레길을 시작한 이유도 내가 걷고 싶어서이다. 내가 걷고 싶어 공지를 올렸고, 이 길을ㅈ걷고 싶어 하는 마음씨 고운 분들이 오셔서 오히려 나를 이끌어 가고 있다. 너무 고맙다. 가끔은 미안하다. 길을 잘 찾고 자신 있게 앞서가는 길 안내자들을 보며 기가 죽기도 한다. 하지만, 길을 잘 알아야 된다는 규정이 없으니 기죽을 일은 아니다. 너무 뻔뻔한가?
일반적으로 리더의 자격 중 하나로 통솔력을 얘기한다. 조직을 원만하게 이끌어가고 조직의 생산력을 극대화사키기 위해 팀원들을 관리하는 리더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동호회 모임에서 강한 리더십과 통솔력으로 동호회 회원들을 이끄는 것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비록 길 안내자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런 방식의 통솔을 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특수 상황이나 위험한 상황에서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팀원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 외의 상황에서는 강한 리더십을 보여준다고 회원들이 따라오지도 않을 것이고, 즐기기 위해 나온 모임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매우 우스운 일이다. 함께 즐겁게 웃고 걸으며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리더의 역할은 참석자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백인백색으로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르기에 공통분모를 찾아 만족도를 높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참석자 개개인도 자신만의 요구를 내세우는 것은 전체 화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며 언행에 주의를 할 필요도 있다. 통솔력이 없는 나로서는 ‘통솔력’이라는 조항이 없으니 이 또한 매우 다행스럽다.
길도 잘 모르고, 길 찾는 것도 못하고, 통솔력도 없는 나는 과연 길 안내자로서 어떤 자격이 있기에 지금 이 역할을 하고 있을까? 적어도 한 가지 자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걷는 것을 좋아하고 길을 사랑한다. 어떤 길이든 길에 대한 차별 없이 길을 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함께 웃고 떠드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아차리는 민감성을 갖고 있어서 마음을 다치지 않게 보살피며 얘기할 수 있다. 건강과 행복에 대해 얘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경청과 공감 능력을 갖고 있다. 이 정도면 길 안내자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너무 뻔뻔한가?
경기 둘레길은 장기 프로젝트다. 약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프로젝트다. 거의 매주 만나 걷는다. 자주 나오는 사람들과는 가까운 친구들이나 친인척 보다 훨씬 더 많이 자주 만난다. 자주 만나 얘기하고 걷다 보니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며 이해심도 넓어진다. 때로는 나오기 싫을 때에도 그놈의 정 때문에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가까워질수록 더욱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들었다. 나 자신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고 반성을 한다. 어느 순간 가깝다고 느끼면서 친밀감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 가끔은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 조심스럽다. 그리고 장기 프로젝트가 주는 피로감과 부담도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진행하는 이유는 우선 완주하고 싶고, 피로감과 부담감보다는 행복함과 즐거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초심으로 돌아갈 때이다. 이제 ‘경기 갯길’도 앞으로 세 번만 더 진행하면 끝나게 된다. 그리고 남은 구간인 경기 숲길을 3월 중순부터 시작하게 된다. 모두 마치는 시기가 금년 7, 8월쯤 될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난 기간 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길동무들의 따뜻한 마음과 노력 덕분이다. 길 안내자로서 그분들이 즐겁게 걸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부족하지만 나름 노력해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길 안내자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남은 길을 무사히 또 즐겁게 마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질 필요가 있다. 경기 둘레길을 단 한 번이라도 참석하신 모든 길동무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길을 완주할 때까지 서로 존중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걷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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