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올림픽 공원을 걷다가 우연히 한 구석에 설치된 조각품을 발견했다. 원래 미술, 음악 등 예술 분야에 문외한이고 무관심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 조각품이 시선을 끈다. 잠시 멈춰 작품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은 후 전등을 비추어 조각품의 제목을 확인했다. 이런 행동이 내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대화’라는 작품이다. 간단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깝게 다가가서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두 사람이 몸을 서로에게 기울이는 형상이다. 뇌 부분이 없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상하게 이 작품이 자꾸 떠올라 오늘 아침에 일어나 어제 찍었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며 나름대로 작품을 해석해 보았다. 물론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일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작품을 보는 사람마다 각각 느낌이 다를 수 있다. 또 같은 작품도 자신의 마음에 따라, 날씨에 따라, 주변 환경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뇌 부분이 잘려 나가고 눈과 귀가 없다. 뇌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버린 것을 표현한 것이다. 자라난 환경, 배운 교육, 스스로 겪은 경험, 그리고 간접적인 체험 등의 결과물이 지금 자신의 사고와 관념이다. 자신은 바로 자신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의 생각이 기준이 되어 판단하고 재단하고 평가하게 되면 참다운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일방적인 대화이거나 불필요한 충고나 조언, 또는 꼰대 짓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방적인 대화’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오히려 ‘시끄러운 소음’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뇌 부분이 잘려나간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타인의 말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참다운 대화는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들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눈과 귀가 없다는 것은 보고 들은 것이 반드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모든 것이 설사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이 아닐 가능성도 매우 높다. 사실과 진실의 경계는 무엇일까? 미디어에 나온 모든 내용들은 과연 사실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미디어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를 비우고 진실에 입각한 사실만을 보도하고 있을까? 확신이 안 든다. 사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고, 진실이 거짓이 될 수도 있다. 거짓, 진실, 사실은 하나가 될 수도 있고, 하나로 만들 수도 있고, 허구 일 수도 있다. 굳이 미디어까지 얘기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집중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과연 내가 듣고 본 세상이 ‘참’일까? 아니면 ‘허상’일까? 내가 보고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 ‘참 주인’은 누구일까? 과연 그 주인공이 ‘참 나’일까? 아니면 ‘거짓 나’일까? 이 둘의 경계는 무엇인가?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삼라만상은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 ‘나’라는 기준을 갖고 바라보는 세상은 이미 ‘참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참 주인공을 알지 못하는 한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사찰 입구에 가면 ‘入此門來(입차문래) 莫存知解(막존지해)’라는 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찰 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들어오라’는 의미다. 굳이 사찰에 갈 때만 적용할 필요는 없다. 대화를 나눌 때도 또 일상 속에서도 이 문구가 필요하다. 상대방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만 참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경청의 의미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상대방의 얘기를 들으며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재단하고 또는 자신이 할 얘기를 하기 위한 기회만 노리고 있다면 이미 경청이 아니라 듣는 것 자체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있는 모든 상식과 지식, 편견과 자신의 기준을 버리고 온전히 상대방의 말, 다양한 표정과 표현을 집중해서 보고 듣는 것이 경청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상대방의 모습이나. 귀에 들리는 상대방에 대한 소문으로 상대방을 평가한다면 이 역시 경청과는 매우 먼 얘기가 된다.
작품 속 두 사람 모두 한쪽 팔이 잘려 나가고 없다. 이는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고 한다. 살아보니 알 것 같다. 한평생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다. 주어진 삶이기에 또 해야만 하는 소명이 있기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서로에 대한 연민과 베풂이다. 상대방의 고통을 느끼며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그에 맞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고해 속을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고통은 느껴본 사람들만이 그 고통을 공감할 수 있다. 지옥철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정치인들이 지하철을 한번 타보고 힘들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매우 공허한 얘기일 뿐이다. 고통을 덜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옆에 서서 함께 고통을 느끼며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옆에서 지지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다. 작품 속 한 사람은 팔이 잘려 나갔고,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공감하기 위해 스스로 팔 한쪽을 잘랐다. 마치 불교 선종 제2조인 혜가 대사가 불법을 구하기 위해 팔 한쪽을 칼로 베어내 듯.
이런 준비가 될 때 비로소 가슴이 열리기 시작한다. 작품에서는 사선으로 고통스럽게 가슴이 잘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을 버리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가슴을 활짝 열고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는 사라지고 타인이 내가 되는 과정이다. 아니면 내 속에 타인이 들어오는 매우 큰 작업이다. 한 번에 쉽게 고르게 잘리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균열이 생기며 서서히 고통스럽게 틈이 벌어지며 열리기 시작한다. 이 균열된 형상을 보며 부처의 고행상이 떠오른다. 결가부좌를 한 상태에서 목숨 걸고 수행하고 있는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부처의 모습을 표현한 고행상. 그런 고통 속에서도 작품 속 두 사람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하다. 고행상의 부처 얼굴 역시 매우 평온하다. 만약 이런 균열이 없었다면, 또 눈과 귀와 팔이 그대로 있고, 뇌도 그대로 있다면 얼굴에는 온갖 세상의 고통을 머금은 표정이 나타날 수도 있다. 마치 나한전에 있는 수많은 나한들의 모습이 수많은 인간의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듯이.
‘대화’의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다. 이 정도의 관계가 된 사람들은 굳이 말이 필요 없다. 염화시중의 미소이다. 비로소 작품 속 두 사람은 말 없는 참다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입이 다물어져 있는 이유이다. 하체 부분은 고정되어 있고 상체 부분이 횡으로 잘리며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하체 부분은 고정관념이고 상체 부분은 가슴이 열린 변화된 관념이다. 하체 부분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언젠가는 고정관념 자체가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식(識)이 사라지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체는 점점 더 상대방에게 몸을 기울이며 집중하고 있다.
이 작품을 감상하며 과연 나는 상담심리사로서 내담자의 말에 집중하며 들었던 적이 있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된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에게 몸을 기울이며 집중해서 들었던 적이 있는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기보다는 말할 기회를 노렸던 적은 없는가? 인간 중심 상담의 창시자인 칼 로저스는 공감을 마치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간 것처럼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 하고 상대방에 대한 모든 편견과 판단을 멈추어야만 한다. 조각품 ‘대화’의 다른 이름을 짓는다면 ‘경청’이 되고, 나아가 ‘공감’이 될 수 있다. 조각품이 내게 상담심리사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작가에게 또 작품 ‘대화’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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