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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못된 놈, 소심한 놈, 어리석은 놈

by 걷고 2022. 9. 30.

목요일 저녁이 되면 일주일이 끝난 느낌이다. 해야 할 일들이 월요일부터 목요일에 몰려있다. 그렇다고 큰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우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아무튼 목요일이면 할 일이 모두 끝난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괜히 피곤이 몰려온다. 한 주일이 끝났다는 시원함과 편안함이 만들어 준 여유와 노곤함이다. 그렇다고 바로 잠을 자거나 하지도 않고, 이것저것 꼬물거리며 괜한 시간만 죽이고 있다. 시간을 죽이는 것이 예전에는 무척 힘든 일이었는데, 이제는 즐기는 일이 되어 버렸다. 쓰고 싶은 글도 쓰고 책도 몇 줄 읽는다. 그리고 TV를 틀고 영화를 본다.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보기도 한다. 뉴스와 영화 외에 다른 프로그램은 거의 보지 않는다. 별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괜히 시간이 아깝다며 늦게까지 버티다 새벽 1시가 되어 잠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니 7시. 평상시에 일어나는 시간이다. 늦게 자나 일찍 자나 기상 시간은 거의 비슷하다.   

  

한 시간 명상을 한다. 호흡 명상을 한 후 집중이 되면 위빠사나를 한다. 어느 날은 한 시간이 너무 길고 지루하게 느껴져 미리 다리를 푸는 날도 있다. 오늘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시간이 흘러갔다. 집중이 잘 되었다기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만들어 준 것 같다. 아침을 명상과 함께 여는 것도 좋다. 아내가 미리 준비해 놓은 아침 식사를 한다. 야채샐러드, 사과, 요플레, 빵, 닭 가슴살로 이루어진 식단. 산티아고 다녀온 후부터 바뀐 아침 식단이다. 반드시 밥과 국, 찌개가 있어야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아내는 식사 준비가 편해졌다고 한다. 나도 밥, 국, 찌개 없이 먹는 식사가 훨씬 더 간편하고 편하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니 8시 30분경. 걷기 모임 참석자 한 분이 취소하셔서 차량 사용료 환불하는 것을 총무 역할해 주시는 분에게 부탁했다. 막상 하고 나니 너무 이른 시간에 연락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미안했다.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백수인 나의 입장만 생각하고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배려 없이 아무 때나 연락할 꼴이 되어 버렸다. 일찍 연락해서 미안하다는 카톡을 보냈다. 늘 바로 답장을 보내는 분인데 아무 답장이 없다. 괜히 마음이 쓰인다. 혹시 너무 일찍 연락해서 화가 난 것은 아닐까? 걷기 위해 나왔는데, 이런저런 일을 시킨다고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많아진다. 조금 후에 이미 환불 처리했다는 답변을 보내며 언제든 편히 연락하라는 고마운 카톡을 보내왔다. 그 짧은 시간에 환불처리를 하느라 답장을 바로 못한 것이다. 고맙고 미안했다. 상황을 반추해보니 참 소심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또한 나의 입장만 고려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전혀 하지 않는 못된 놈이라는 생각도 든다.      

 

뒷산에 가려고 짐을 챙기다 선글라스가 보이지 않는다. 궁금해서 딸네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이 시간이 아내에게는 무척 바쁜 시간이다. 손주들 식사 먹이고 어린이집 보내기 위해 정신없이 바쁜 시간이다. 아내 상황과 상관없이 묻고 싶고 궁금한 것을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 찾아보더니 선글라스가 없다고 한다. 다시 뒤져보니 내 배낭 속에 들어있다. 아내에게 찾았다고 카톡을 보냈다. 굳이 그렇게 급하게 연락할 일도 아닌데, 아내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편리함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놈이다. 말로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니고 글에도 강조하면서 정작 실생활 속의 모습은 글이나 말과 이율배반적이다. 모순 덩어리인 자신의 진면목을 본다. 못된 놈이다. 또한 내가 선글라스를 배낭에 넣으면서도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니 내 안에 다른 놈이 살고 있고, 그놈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주인이 주인 자리를 어떤 놈에게 빼앗긴 상태이다. 빨리 주인 자리를 되찾아 와야 한다.   

   

남의 상황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몸에 배어있다. 사회생활하면서 만들어진 못된 버릇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빼내려고 많이 애를 썼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조금이라도 사라지길 바라고 노력했는데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변한 모습을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들이 인식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늘 보는 사람들이기에 변했더라도 변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자라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연은 계절에 순응하며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변하는데 사람은 삶 속에서 순응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강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집만 강해지기도 한다.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못된 놈이며 동시에 상대방의 감정을 신경 쓰고 있는 소심한 놈이다.      

 

뒷산에 오른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조용히 걷기에 아주 좋은 길이다. 오늘따라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대여섯 명 이상 본 것 같다. 꽤 자주 걷는 산길인데 오늘처럼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많이 본 적은 처음 있는 일이다. 갑자기 봉산이 맨발 걷기 명당이 된 것 같다. 그분들도 어떤 변화를 위해 맨발 걷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변화를 기대하고 맨발로 걸을까? 과연 맨발 걷기는 효과가 있을까? 그들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든, 어떤 이유에서 걷든 왜 궁금할까? 궁금한 생각을 접고 몸의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다. 일부러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골라서 걷는다.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 루트가 있다. 물론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약 2km 정도 되는 이 길에서 사람들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 만나도 한 두 명 정도.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여유롭게 걸으며 자유를 느낀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 길은 갈 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길이다.      

 

70대 노인 네 분이 앞에서 걸으신다. 비아그라 얘기를 하시는 것이 들렸다. 열정이 대단하신 분들이다. 아침 일찍 나오셔서 산길을 걸으실 수 있고, 함께 걷는 친구들이 있고, 즐겁게 수다를 떨 수 있고 어떤 얘기든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동년배의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분들은 이미 충분히 건강하고 행복하신 분들이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원한다. 걸으며 자애명상을 한다. 나 자신부터, 모든 존재들,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자애명상을 하며 걷는다. 한 사람씩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린다. 자애 명상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이상하게 아내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딸과 사위, 손주들, 장모님, 지인들 얼굴은 쉽게 떠오르는데 왜 아내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을까?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집에서 아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오늘 걸은 길은 몇 년 전에는 왕복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오늘은 2시간 20분이나 걸렸다. 일부러 천천히 걸은 것도 있지만, 동작이 많이 느려진 것이다. 못된 놈, 소심한 놈에 몸이 둔한 놈까지 되어 버렸다. 최근에 눈이 조금 안개가 낀 듯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아 안과에 갔더니 백내장이 막 시작되었는데 아직 수술할 단계는 아니라고 한다. 의사는 약 처방도 해주지 않고 1년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하라고 한다. 나아질 방법을 물으니 그냥 노화현상이니 받아들이고 지내라고 한다. 나이 들면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고 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진리인 것 같다.      

 

길을 걸으며 자신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 못되고 소심한 놈이다. 또한 이런 버릇이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어리석은 놈이다. 이 사실은 죽을 때까지 늘 인식하고 자신에게 상기시키며 살아가자. 이런 놈이 굳이 의견을 누군가에게 주장한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니 의견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음, 못됨, 소심함을 드러내는 것이니 죽은 듯 조용히 지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게다가 어리석은 사람이니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거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남의 삶에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며 살면 된다. 못된 놈, 소심한 놈, 그리고 어리석은 놈인 나 자신에게 한 가지 다짐한다. 자신을 진면목을 제대로 확실하게 인식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나와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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