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둘레길 40코스가 시작하는 칠장사의 정상 위에는 칠현산(516.2m)의 표지석이 있다. 칠장사와 칠현산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안성에 위치한 칠장사(七長寺)의 예전 사찰명은 칠현사로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칠현사가 칠장사로 사찰명을 변경한 이유는 찾아볼 수 없다. 한자 사전을 찾아보니 장(長)의 뜻은 ‘길다’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낫다’, ‘나아가다’, ‘자라다’ 등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일곱 명의 도적들이 혜소국사에 의해 교화되면서 점점 인간으로 한 층 더 성장하고 성숙해가고 있다는 이유에서 칠장사가 된 것이 아닌가라고 의미를 부여해 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경험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변해간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람들은 변해간다. 비단 사람들뿐만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무상(無常)이다. 무상은 희망의 단어이다.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상황이 변한다는 희망과 가능성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만약 변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무기력에 빠질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일곱 명의 도적은 혜소 국사에 의해 성인으로 변했을 것이다.

단풍이 막 시작한 사찰 경내는 매우 차분하고 아름답다. 스님들의 발걸음이 바빠 보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사찰은 고요한데 고요함 속에 활기가 느껴진다. 사찰 경내 한 곳에 의자와 천막이 설치되어 있고 점안식 행사가 있다는 현수막이 높게 걸려있다. 점안식은 불상의 눈에 점을 찍어 눈을 뜨게 만드는 의식이다. 눈은 있되 뜨지 못하는 사람은 장님이다. 불상 역시 눈을 뜨지 못한 불상은 불상이 아니다. 눈에 점을 찍으며 비로소 부처가 된다. 우리는 눈을 갖고 있지만 눈 뜬 장님처럼 살아간다. 눈 뜬 장님에게는 암흑 세상만이 보인다. 장님에게 눈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참모습은 아름답고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 욕심과 어리석음과 분노라는 세 가지 독(三毒)에 의해 눈병이 생기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삼독에 의해 가려진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불평하고 주위 사람들과 수많은 갈등을 일으키며 살아간다. 그리고 세상살이가 점점 더 힘들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삼독을 제거하면 되는데 그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다. 길을 걷는 행위는 단순한 신체 운동이 아니다. 길을 걷고 길동무들과 얘기를 나누며 자연을 통해서 배우고 길동무들을 통해서 배운다.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드는 행위가 바로 걷기이다.

점안식 행사는 천수경 독경으로 시작된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로 시작되는 천수경은 경의 중심인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모시기 위한 경전이다. 이 다라니경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진언 문으로 번역하지 않는다. 천수경을 봉독 하며 주변을 맑게 만들고, 맑게 만든 후에 비로소 부처님을 찬탄하고, 그 이후에 점안식 행사가 시작된다. 우리가 명절에 차례를 지내거나 제사를 지낼 때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과 같은 의식이다.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천수경 독경 소리가 산과 주변을 맑게 만들어준다. 이 경을 듣는 산속의 모든 유정, 무정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기원한다. 일곱 명의 교화받은 중생은 물론이고, 칠현산을 걷는 우리들과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평온하고 행복하길 기원한다.
칠현산은 일곱 명의 현인들이 다시 태어난 신령스러운 곳이어서 그런지 산길이 매우 아름답다. 막 시작된 단풍이 만들어 낸 단풍 터널과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우리를 반기는 낙엽들의 합창도 아름답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약간 경사져있기는 하지만, 산세가 만들어주는 편안함과 아름다운 풍경은 힘든 것을 잊게 만들어준다. 정상에 오른 후에는 완만한 능선으로 이루어진 걷기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길이 펼쳐진다. 능선을 따라 걷다가 다시 오르막 그리고 내리막이 반복된다. 산 아래에는 비스듬한 산의 사면과 임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걸어갈 길이다. 내리막은 제법 경사가 심하다. 두 분은 걷다가 잠시 자연과 스킨십을 하기 위해 일부러 넘어지기도 한다. 좀 더 자연과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슬랩스틱일 뿐이다. 그 모습도 보기 좋다.

임도가 끝난 후 도로를 따라 걷다가 조령 초등학교를 만나니 괜히 반갑고 옛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운동장이 있고, 단층으로 만들어진 건물에 교실들이 길게 이어져있다. 계단 앞에서 단체 사진 한 장 찍는다. 마치 예전의 초등학교로 수학여행을 온 듯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금광호수를 따라 아름답게 설치된 데크길을 걷는다. 마치 호수 위를 걷는 느낌이다. 어떤 사람이 배를 띄워 놓고 여유롭게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순간 시간 여행을 떠나 먼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40코스를 마친 후 41코스 일부를 더 걷는다. 41코스와 41코스를 다음에 완주하기 위해 무리해서 조금 더 걷는다. 나지막한 쑥고개를 넘는다. 칠현산을 이미 넘은 우리에게 쑥고개는 단지 고개라고 이름만 지어졌을 뿐 평지에 불과하다. 높은 산을 하나 넘고 나면 낮은 산은 평지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삶 역시 마찬가지다. 삶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고난을 우리를 단련시킨다. 그리고 고난이 우리의 삶을 좀 더 편안하게 살게 만들어주기 위한 선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칠장사의 도적들이 성인이 되듯, 우리들 삶의 고통 역시 우리를 부처로 만들어 준다. 마둔 호수에서 길을 마친다. 함께 걸은 길동무들의 얼굴에는 19km의 난코스를 걸었다는 자긍심이 가득하다. 그 자긍심은 삶을 살아가는 데 매우 요긴한 자기 효능감으로 발전한다.
길을 마친 후 합정역에서 귀가할 길동무들은 귀가하고 남아있는 길동무들은 뒤풀이 장소로 이동한다. 맥주집에 둘러앉아 술 한 잔 마시며 길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서로 살아온 얘기를 나눈다. 우리는 하루에 두 번 걷는다. 경기 둘레길을 발로 걷고, 뒤풀이에서 나의 뜰과 길동무의 뜰을 걷는다. 나의 벽을 허물고 나니 너의 앞마당이 나의 뜰이 되고, 나의 뜰이 너의 정원이 된다. 그리고 뜰과 앞마당, 정원이 모여 공원을 이루고 마을을 이룬다. 단지 나의 벽을 허물었을 뿐인데, 온 세상이 나의 것이 된다. 그리고 너의 것이 된다. 아름다운 세상이다. 좁은 자신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자신의 세상을 허물고 넓은 세상을 활기차게 살아가느냐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벽 안에서 꽁꽁 숨어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안타깝고 짠해진다. 마음의 벽을 허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길동무들과 자연을 함께 걷는 것이다. 건강도 챙기고, 마음의 뜰도 넓어지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넓어진다. 칠장사와 칠현사를 걸으며 우리 모두 부처가 된다. 칠장사의 점안식은 장님이 된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든 우리를 위한 의식이다. 칠장사와 길동무들과의 깊고 귀한 인연에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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