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와 거리: 21210805 7km
코스: 불광천
평균 속도: 4km/h
누적거리: 4,562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며칠 전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은둔형 외톨이’란 가족 외의 인간관계를 거의 하지 않고, 6개월 이상 주로 집 안에서 생활하며 편의점이나 자신의 취미생활 등을 위해 집을 나가더라도 인간관계를 전혀 맺지 않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사회적 기업인 K2 인터내셔널 교육팀장인 오오쿠사 미노루씨가 강의를 진행했다.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의 은둔형 외톨이를 위해 8년 이상 다양한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히키코모리는 일본어로 ‘틀어 박히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앞으로 마음 복지관에서 K2 인터내셔널과 협약을 맺고 대면 심리상담을 진행한다고 하니 고맙고 좋은 일이다. 의미 있는 활동에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고 기쁘다.
오랜 경험 속에서 나온 강의는 무척 생동감이 있게 느껴졌다. 특히나 히키코모리였던 사람들이 악몽에서 벗어나 다른 히키코모리들을 위한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은둔 고수’들의 얘기는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각자 프로필을 갖고 있는데, 별의 개수로 고수의 등급(?)을 정한다. 별의 개수는 자신들이 겪어냈던 은둔형 외톨이 기간을 의미한다. 그들의 별은 그만큼 가치와 의미가 있는 별이다. 힘든 세월을 겪어낸 인생 계급장이다. 그들이 감추고 싶어 했던 그 기간이 오히려 그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는 프로필이 되었다.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기간이 의미 있는 기간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힘들었던 얘기를 들으며 많이 안타까웠다. 또한 힘든 상황을 극복한 후에 자신들이 겪었던 과정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수행자보다 더 숭고하고 거룩하게 보였다. 그들은 참다운 인생 은둔 고수들이다. 그들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상담 시 참고하고 싶어서 강의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정리해 보았다. 가장 눈에 띈 단어가 있었다. 바로 ‘내 자리의 상실’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기 이전에 부모의 과잉 간섭, 부모 불안의 투사, 강요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 등으로 살아야만 되는 ‘강요된 삶’은 자기감의 상실을 초래한다. 세상 속에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어느덧 사라지고, 부모를 포함한 사회적 기준에 맞추는 삶을 살아야만 된다는 사실이 주는 절망감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다. 부모와 주위의 인정을 받기 위해 거짓 자기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 와중에도 자신을 찾아야만 하는가라는 갈등은 특히나 청소년 시기에는 스스로 극복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계속해서 걸어 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 속에서 자기감을 회복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울 것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계속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은 포기하게 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허탈감과 무망감은 무기력과 우울증, 대인기피 현상 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으며,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찾아오는 막막함은 모든 의지를 좌절시킨다. 이불을 박차고 나올 아무런 이유가 없기에 이불속에 머물게 되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점점 은둔형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불필요한 말 한마디가 큰 상처를 주며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아는 점점 더 작아진다. 집 밖의 모든 사람과 상황은 무서운 존재이며 불안한 곳이다. 점점 더 자신만의 성을 높고 두껍게 쌓아가며 성 안에만 머물게 된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과 좌절감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다. 나 역시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집에만 있기에 가족들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밖에 나갈 약간의 힘이 있어서 무작정 홀로 걸었다. 그때의 수많은 감정들이 강의를 들으며 떠올랐다.
‘Having (가진 것) -> Doing (할 일) -> Being (존재)’이라는 도표도 인상에 많이 남는다. 이 화살표 방향이 ‘Being -> Doing -> Having’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이미 의미가 있고 아름답고 존중받아야 한다. 사회는 어떤 것을 성취 (Having) 하기 위해 어떤 일 (Doing)을 해야만 한다고 강요하고 교육시킨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 (Being)라는 것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나’라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하고, 그 일을 함으로써 어떤 것을 성취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존재는 무엇을 하며 무엇을 성취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존재는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의미라면 새 한 마리, 길가의 돌멩이, 흐르는 물, 천둥, 바람, 바위는 존재의 의미가 없어진다. 이런 유정, 무정물들의 존재가 사라지면, 그 세상 속에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인생 후반기의 삶은 ‘Doing Mode’에서 ‘Being Mode’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하지만 인생 후반기에 갑자기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재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일은 평생 진행되는 일이다. 존재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고, 그 일의 결과로 어떤 것을 성취하게 된다. 성취물은 부산물에 불과하고, 하는 일은 존재가 원하는 일이니 즐겁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니 삶은 풍성해진다. 어쩌면 평생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은 여정(journey)라고 한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삶이고 여정이다. 삶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고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여정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 결정권과 주도권을 갖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강의를 들으며 은둔형 외톨이에게 필요할 것이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들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같이 서 있으면 된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과 활력의 샘은 메말라있다. 메마른 샘을 바가지로 박박 긁으며 물을 퍼내려 하면 샘은 점점 더 말라간다. 그냥 그대로 가만히 두면 아주 천천히 조금씩 물이 차 오른다. 자신이 샘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샘물이 조금 차면 샘물은 자신의 역할을 저절로 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 줄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샘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 존재(Being)이고, 물이 고이며 샘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 행동(Doing)이며, 고인 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바로 성취(Having)이다. 이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자신 스스로, 그리고 주변에서 함께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할 뿐이다.
얼마 전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다. 한 친구가 힘든 얘기를 했는데, 그 친구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반면 함께 있었던 다른 친구는 그 친구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상담사인 나는 크게 좌절했다. 일반인보다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상담 센터에서 나를 채용하지 않고, 상담할 내담자가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상담사라는 틀로 인해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으로 상담을 진행했던 부끄러운 경험들이 많이 있었다. 아마 그런 상담은 전혀 내담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상담받으며 도움을 받지 못했던 모든 내담자들에게 이 글을 통해서 진심으로 사과한다.
친구들과의 모임 이후 상담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그냥 잘 듣기’이다. 공감, 경청, 판단 내려놓기 등 좋은 말은 모두 버려버렸다. 그리고 ‘그냥 잘 듣자’를 하기로 했다. ‘잘 들어주기’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도움 줄 생각도 하지 않고, 가족을 포함해서 만나는 사람들 말을 잘 듣는 것이 요즘 연습하는 일이다. 내게는 이 일이 ‘듣기 명상’이다. 듣는 중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자각한 후 다시 ‘듣기’에 집중한다. 앞으로 히키코모리 상담을 진행할 때에도 이런 마음으로 진행할 것이다. 그냥 옆에서 들어주는 사람, 할 말이 없으면 그냥 같이 침묵 속에서 함께 있는 사람. 상담의 주도권을 모두 내담자에게 주는 사람, 그런 동반자가 되고 싶다. 좋은 강의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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