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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55] 무라카미 하루키와 나

by 걷고 2021. 7. 30.

날짜와 거리: 20210729 12km
코스: 광흥창 – 한강 공원 – 월드컵 공원 – 불광천
평균 속도: 4km/h
누적거리: 4,503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집 안에서 에어컨만 틀고 살 수도 없다. 오전 일과인 명상과 글쓰기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집 뒷산인 봉산을 오르기로 했다. 상암동 주변의 공원과 한강 공원, 그리고 봉산은 내가 즐겨 찾는 걷기 코스이다. 집 주변에 걸을 수 있는 좋은 길이 있어서 좋다. 같은 길을 걸어도 좋지만, 가끔 코스의 변화를 주는 것도 걷는 재미의 하나가 된다. 같은 길도 역방향으로 걸으면 다른 길이 되고, 길과 길을 연결하며 코스를 비틀면 또 다른 길이 된다. 코스를 만드는 재미, 걷는 재미, 걸으며 느끼는 자유로움과 편안함, 걷기 마친 후 땀을 씻어내는 상쾌함, 이런 과정을 마치면 뭔가 큰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 게다가 샤워 후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까지 더해지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더위를 잊고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는 더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봉산에 오르기 위해 스틱을 꺼내는데, 삼단 스틱의 마지막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워낙 기계치이고 똥 손이 나는 갑자기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릎 수술 이후에 아무리 낮은 산을 가더라도 반드시 스틱을 사용한다. 스틱이 없다는 것은 산을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와 같다.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하는데 계속 기계음만 울린다. 답답한 마음에 화가 올라온다. 산을 오르지 못하게 되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간 잠자고 있었던 급하고 못된 성격이 다급한 상황에서 저절로 튀어나온다. 마음이 편해진 것이 아니고 못된 성격을 잠시 잠재워두었던 것이다. 산속의 모든 화기와 용암들이 사라졌는지 알았는데, 이는 완전히 착각이었다. 내 마음속 분노, 짜증, 불편함, 원망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인 시각 등은 사리진 것이 아니고 잠시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있었던 것이다. 휴화산이다. 휴화산이 어쩌면 활화산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서비스 센터 위치를 인터넷으로 검색한 후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광흥창 역 부근에 있는 레키 서비스 센터를 찾아갔다. 주인이 외출하며 전화번호를 가게 앞 유리창에 붙여놓았다. 전화를 걸었더니 10분 정도 기다리라고 한다. 서비스 센터에 도착하니 마음이 안정되어 그런지 오히려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일 마친 후 차 한잔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선배는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조금 후에 주인이 돌아왔고, 너무나 쉽게 A/S를 받았다. 조금만 스틱을 살펴보고 요령이 있는 사람이라면 혼자서도 쉽게 고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분리였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에 한강변으로 나갔다. 봉산을 오르지는 못해도, 한강변을 따라 걸으며 집까지 걷고 싶었다.

습기가 많은 무더운 날은 걷기가 쉽지 않고 몸이 무겁다. 다행스러운 점은 걷는데 몸이 익숙해져서 전혀 걷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없다는 것이다. 한강변에 나가자마자 스틱을 펼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무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사람과 상황을 쉽게 믿지 못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한강변의 평지를 스틱을 사용하며 걷는 자신이 조금 우습게 보이기도 했다. 나무에서 울어대는 매미소리는 머리 위 강변도로를 달리는 자의 소음을 삼켜버린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간혹 보이기도 하고, 걷는 사람도 간혹 보인다. 한강 공원은 사람 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적하다. 강변에 설치된 수도를 틀었는데, 물이 따뜻하다. 따뜻한 물이 나온 한참 후에 찬 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만큼 날씨가 덥다. 걷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해서 어디냐고 묻는다. 귀가 시간에 맞춰 아내는 자신의 일정을 조정한다. 한 시간쯤 후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하며 냉장고에 맥주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다행스럽게 있다고 한다. 시원한 맥주가 그립다. 속도를 조금 높여서 걷기 시작했다. 맥주가 걷기의 동력이 되었다.

씻고 나서 마치 무슨 개선장군이 된 것처럼 씩씩하고 당당하게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캔 맥주라서 그냥 마셔도 되는데, 괜히 자신에게 뭔가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캔을 오픈한 후에 유리잔에 맥주를 따랐다. 맥주의 연한 노란 액체와 올라오는 방울, 하얀 거품이 드러나는 유리잔에 맥주를 따른 후 눈으로 감상하고 한잔 들이켠다. 그 첫 한 잔의 맛이 최고다. 한잔을 마신 후 다시 한 잔을 따라 마신다. 땀을 흘리며 걸은 자신에게 베푸는 보상이다. 앞으로 걸은 후 맥주가 자꾸 생각날 것 같다. 지금까지는 갈증 해소를 위해 맥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길동무들과 함께 걸으면 걷기 마친 후 뒤풀이에서 한잔 마시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들의 제안에 따랐을 뿐이지 먼저 마시고 싶다, 또는 마셔야만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 맛 본 맥주의 맛은 앞으로도 계속 떠오를 것이고, 땀 흘려 걸은 후 한잔 마시는 일은 습관이 되어버릴 것 같다.

맥주를 마신 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를 읽었다. 재미가 있어서 쉽게 그리고 빨리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 그는 작가이며 러너이다. 심지어 자신의 묘비명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 1949 – 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고 써놓고 싶다고 했다. 이 책을 탈고한 시점인 2007년 8월까지 총 25회의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했고, 100 km 울트라 마라톤도 완주했으며, 트라이애슬론 경기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마 완주 횟수가 많이 늘었을 것이다. 그가 뛰기 시작한 이유는 전업작가가 된 이후에 책상에 앉아 글만 쓰다 보니 살이 찌고 엄청난 골초가 되어 건강에 이상 신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건강과 작가로서 활동을 꾸준히 하기 위해 마라톤을 선택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작가는 홀로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았고, 그것이 바로 마라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나를 비교해 보았다. 그는 유명 작가이자 러너(runner)이다. 나는 무명작가이자 워커(walker)이다. 그는 약 10 시간에 걸쳐 100 km 울트라 완주를 했고, 나는 11시간에 걸쳐 50 km 걸었다. 그는 매일 10 km 이상 뛰려고 노력하고 있고, 나는 10 km 정도 걸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뛰면서 작품을 구상하고, 오전 내내 글쓰기 작업을 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오전에 글쓰기를 한다. 큰 차이점 하나는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이고, 나는 아직 제대로 작가 반열에 들지도 못한 그냥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라톤 대회에 참석해서 공식 기록증을 받았고, 나는 산티아고 순례와 서울 둘레길 완주증을 받았다. 왜 그와 나를 비교하며 글을 쓰고 있을까? 나보다 8살 연상인 그는 아마 지금도 뛰고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두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럴 것이다. 그를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그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런 비슷한 점을 통해 지금 나의 삶이 그다지 잘못된 삶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타고난 재능, 집중력, 그리고 꾸준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것보다 글을 통해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경쟁하듯 누군가와 시합하며 승패를 가리는 것보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나도 같다. 경쟁하고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사 이겨야만 된다는 생각으로 승부욕을 보이는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볼썽사납게 느껴진다. 그가 얘기하는 작가의 성공 요인 세 가지는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다. 이 세 가지만 지니고 있다면 어떤 일을 하든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집중력과 꾸준함을 갖고 있다. 어릴 적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체득된 습관이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 있다. 다만 그에게 있는 것 중에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재능’이다.

내가 아는 한 나만의 특출한 재능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상담사로서 공감하는 능력도 많이 부족하다. 상담사가 된 이유도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보다는 인생 후반기에 경제적 소득을 위한 방편으로 택한 것이다. 당연히 공감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다행스러운 점은 상담을 통해서 경제적 수입을 얻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나니 이제서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내게 어떤 재능이 있을까? 최근에 한 가지 신체적 특성을 발견했다. ‘발’이 건강하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선물이다. 군대에서 많은 행군을 했고, 지금까지 많은 길을 걸으면서도 단 한 번도 아주 작은 물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발바닥의 아치도 잘 형성되어 있고 잘 유지되고 있다. 이 발 덕분에 군대 생활도 잘 마칠 수 있었고, 사회에서 힘든 시간을 걷고 뛰며 버티고 견뎌낼 수 있었다. 그에게 글 쓰는 재능이 있다면, 나에게는 ‘건강한 발’이라는 재능이 있다. 그가 마라톤을 꾸준히 하듯, 나는 걷기를 꾸준히 한다. 그가 작품에 집중하듯, 나는 일상 속 삶에 집중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글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고, 나는 걷기를 통해 나눔을 실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유명과 무명의 간극은 줄어들지 않겠지만, 삶의 태도와 방식은 같다. 굳이 그가 롤 모델은 아니지만, 그를 통해 지금 삶의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얻게 되어 기쁘다. 그의 삶을 응원하며 동시에 나의 삶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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