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내가 딸네 가는데 필요한 짐을 차에 실어다 주겠다고 어젯밤에 약속을 했다. 아침에 눈 떠보니 7시. 아내는 이미 나가고 없다. 월요일 아침 러시 아워를 피해 오전 6시경 출발한다. 이른 아침에 무거운 짐을 들고, 어두운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서 짐을 싣고 출발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도와주려고 했는데, 늦잠으로 인해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식탁에 보니 아침 식사도 준비해 놓았다. 아마 5시경 일어나 짐을 싸고, 아침까지 준비해 놓고 출발한 거 같다. 전화를 하면 혹시나 운전 중에 전화받다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되어 아내에게 카톡을 했다. 오전 명상을 한 후에 전화를 했다. 이미 아내는 딸네 도착해서 두 손주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안해하는 내게 오히려 감기 빨리 회복하라며 걱정을 한다. 며칠간 목감기로 고생 중이다. 아내가 차려 준 식사를 하는데 아내가 “짐도 가볍고 날이 제법 밝아서 괜찮았다”라고 카톡으로 답을 보내왔다. 미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배려다. 고맙고 미안했다.
며칠 전 길벗 한 명이 한 말이 생각난다. “요즘에는 가족들 모습이 모두 짠해 보인다. 배우자도, 자식도, 며느리도 모두 짠해 보인다.” 그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살아보니 한평생 산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 각자 안고 있는 삶의 무게가 있다. 삶의 무게가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육신을 지닌 인간이 갖고 있는 실존적 문제도 있다. 죽는다는 것, 질병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늙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한 고통 등이다. 삶의 경험을 통해 어떤 사람도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서로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저절로 올라올 수밖에 없다.
아내가 주말 내내 음식을 준비해서 월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 딸네 가는 모습을 보면 짠하다. 평일 내내 딸네 가서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 짠하다. 주말에 집에 와서 잠에 푹 빠지는 모습을 보면 짠하다. 딸이 두 아이 양육하는 모습을 보면 짠하고, 사위가 늦게 귀가해서 두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보면 짠하다. 그 짠한 가족의 모습을 보는 나의 모습도 짠하다. 하지만 짠한 모습만 있는 것도 아니다. 손주들이 잠자기 전에 잠옷으로 갈아입고 우리 부부가 머무는 방에 와서 안기며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인사를 하고, 우리는 손주들을 안아주며 ‘잘 자라’고 인사를 할 때 행복하다. 큰 손녀가 뜬금없이 방에 들아와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며 잘 들으라고 명령을 내릴 때 행복하다. 딸이 두 아이들을 보며 웃을 때 행복하고, 사위가 귀가 후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아이를 안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삶은 희극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세상 역시 희극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다만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네 마음이 희극과 비극을 만들 뿐이다. 세상은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일반적인 세상이 있고, 우리가 느끼는 우리만의 세상이 있다. 이 둘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사와 상관없이 일반적인 세상은 그 모습대로 돌아가고,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우리만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옳고 그른지, 진짜이고 가짜인지가 중요하지도 않고, 따질 필요도 없다. 일반적인 세상보다는 우리만의 세상이 우리 자신에게 중요할 뿐이다.
인지삼제(認知三題, cognitive triad)는 미국 임상심리학자이자 인지행동치료(CBT)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론 벡(Aron T. Beck)이 제시한 우울증의 세 가지 인지 모형이다. 자기 자신, 자신의 주변환경, 자신의 미래에 대해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자동적 사고를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자신, 환경, 미래는 결국 자신이 바라보는 환경이고 미래다. 이는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고, 그 평가와 판단이 맞는다는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해석할 따름이다. 게다가 ‘자신’은 과연 누구이고 무엇일까? 몸일까? 마음일까? 그 몸과 마음은 늘 똑같을까? 아니면 변할까? 변하는 것이 ‘자신’이라면 그 ‘자신’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자신’이 없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삶의 희극과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해석하는 것에 따라 희극과 비극으로 나눠질 뿐이다. 삶은 그냥 삶이다. 아내는 나를 위해 깨우지 않고 혼자 딸네 가서 오늘 자신의 할 일을 하며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오늘 아내의 삶이다. 나의 삶도 있다. 아침 명상을 하고, 식사를 하고, 신문을 읽은 후에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오전에 할 일은 <붓다의 호흡법, 아나빠나삿띠>를 자세히 읽고 정리하는 일이다. 아나빠나삿띠를 명상의 주제로 정한 후에 이 책을 다시 정독하고 중요한 부분은 글로 정리하고 있다. 오후에는 각묵 스님의 <아나빠나사띠 숫따> 유튜브 강의를 듣고, 두 시간 정도 걸을 계획이다. 저녁 식사 후에 명상을 한 후 뉴스를 보고 휴식을 취하면 하루가 지나간다. 아내가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 듯, 나도 나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다. 딸네 가족 역시 각자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다. 희극과 비극이 존재하지 않는 그냥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미 충분하고 완벽하다.
책상 앞에 성하(聖下) 달라이 라마의 사진과 기도문과 사인이 담긴 엽서가 있다.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크게 기대하는 사람이 나를 심하게 해치더라도 그를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이다. 삶 속에서 고통받게 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인간관계 때문이다. 소중한 하루를 사람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이 기도문이 많은 위로와 위안이 될 것이다. 오늘도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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