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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진 해크먼 부부의 죽음을 애도하며>

by 걷고 2025. 3. 11.

내가 외국 영화배우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배우는 매우 유명한 배우다. 알고 있는 국내 배우 이름도 몇 명 안 된다. 그렇다고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다. 영화를 제법 많이 봤다. 하지만 배우나 감독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진 해크먼이라는 배우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니 그가 유명한 배우임에는 틀림없다. 근데 며칠 전 신문에서 그의 미스터리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고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부부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기사 내용을 요약해 본다.      

 

“사망 당시 해크먼은 95세, 아내는 64세였다. 반려견 한 마리도 죽은 채 발견됐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으로 결론이 났다. 해크먼은 고혈압과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생전 중증 알츠하이머 증상을 앓고 있었다. 배우자는 한타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사망했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해크먼은 약 한 주 뒤쯤 숨졌다. 헤크먼은 중증 알츠하이머를 앓아 아내가 숨진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택 관리인이 경찰에 신고해 발견되었다. 죽은 반려견은 탈수나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크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언제 받았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지난 수년 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고 은둔 생활을 했다고 알려졌다.” (조선일보 2025년 3월 10일)     

 

그의 경제적 상황은 일반인보다는 좋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근데 왜 집에서 고독사를 맞이했을까? 물론 아내가 간병을 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아내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일주일을 살고는 삶을 마감했다.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95세의 알츠하이며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챙겨주는 자식은 없었을까? 가족이나 가까운 친인척과 왕래조차 하지 않았을까? 비록 질병을 앓고는 있었지만 찾아오는 이웃조차 없었을까? 그가 영화배우라는 사실 외에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으니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된다. 다만 안타깝고 슬프고 안쓰럽다. 영화배우로서의 화려한 삶을 뒤로하고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배우로서의 삶 못지않게 중요할 것이다. 이는 비단 배우에게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삶도 이와 같다. 인생을 2막으로 나눈다면 1막을 마친 후 2막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삶의 질과 개인의 행복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아내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내용을 들으니 인생이 참 슬프다. 평생 함께 살아온 사람의 임종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했다니. 심지어 함께 살고 있던 반려견은 탈수나 굶주림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매우 안타깝다. 사람이든 반려동물이든 굶주림이나 탈수로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진 해크먼 부부의 명복을 기원한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발원한다. 비록 서로 상황을 다르겠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 질병을 앓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노부부들, 사람들과 사회와 단절된 채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분들 모두 부디 편안하시길 발원한다.     

경제적인 안정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이 기사를 보며 어떻게 살아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은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죽음도 삶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삶의 고통이 극심한 사람은 삶보다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삶과 죽음은 실존의 문제이다. 태어남도 나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듯, 죽음 역시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또한 태어남은 이미 죽음을 전제로 시작된다. 태어나는 순간 성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삶과 죽음, 삶을 살아가느냐 아니면 죽음을 준비하느냐는 우리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실존적 이슈다. 이 두 가지는 표현상으로는 다르지만 실은 하나다. 삶의 마지막 지점에 죽음이 있다. 하지만 육체라는 면만 생각할 때 이런 논리가 가능해진다. 정신 또는 영혼을 생각한다면 삶과 죽음은 무의미해진다. 육체는 태어났다, 성장한 후, 노쇠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몸을 지닌 존재는 이 생주이멸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도 생주이멸의 원칙을 따른다. 세월의 무상함을 거스를 수가 없다. 육체는 또는 사물은 생주이멸의 원리에 따르지만, 우리가 남긴 족적은 평생 우주 내에 존재한다. 에너지 형태로든, 유전자가 되었든, 또는 무형의 작품이 되었든, 그 존재 방식은 다르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니 죽음을 굳이 준비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삶을 충실하게 살면 죽음 역시 충실하게 맞이하게 될 것이다. 100세 시대라고 한다. 36,500일을 살아가며 원하든 원치 않든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마주치며 살아가야 한다. 그 안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상존한다. 사랑과 미움도 상존하고, 존중과 비하도 상존하고, 칭찬과 비난도 상존한다. 근데 이것이 우리네 삶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둘 중 원하는 것만 취하려는 생각과 욕심이 우리를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것이 어우러져 우리네 삶이 된다. 그러니 좋은 것도 싫은 것도 그냥 그런가 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좋은 면만 받아들이려는 것은 신체의 반으로 생활하는 것과 같다. 한 발로는 오래 걷지 못한다. 머리의 반쪽으로는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고, 장기의 반만으로는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다. 그냥 양쪽 모두 받아들이고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이나 감정에 머물지 말고 let go 하면 된다. 오는 대로 흘려보내자. 좋다고 붙들려고 하지 말고, 싫다고 밀어내지 말자.    

  

오늘 신문에는 NHK에서 백세인 100명을 찾아가 건강 비결을 분석한 내용이 나왔다. 별거 아니다. 음식 잘 먹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내는 것이다. 걸으면 소화가 잘 되니 모든 음식이 맛있다. 걸으러 나가기 위해 또 걷기 위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길벗과 소통하며 즐겁고 웃고 떠들며 지낸다. 걷기라는 취미 한 가지로 방송에서 얘기한 건강 비결을 모두 지킬 수 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고, 잘 놀고, 잘 웃고, 잘 지내면 된다. 삶과 죽음은 별거 아니다. 삶도 생각하지 말고, 죽음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모여서 즐겁게 걷자.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이미 이대로 완벽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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