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일상이 되었다. 지금은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며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오늘 아침에 보니 브런치에 쓴 글이 916편이 된다. 약 7년간 쓴 글이니 매년 130편의 글을 쓴 것이고, 주당 평균 2.5편의 글을 써왔다. 약 3일에 한 편 정도의 글을 쓴 것 같다. 아침 식사를 마친 오전 9시부터 글을 주로 쓰고 있고, 오전 시간은 글을 쓰는 시간이 되었다. 딱히 쓸 글이 없어도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자판에 손을 올리면 뭔가 쓸 글이 떠오르거나, 아니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쓴다. 그러면 어느 순간 글이 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가끔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나를 지배할 때 그와 다른 어떤 글을 쓰게 될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글 자체가 나로 하여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내용을 글로 쓰게끔 이끌어 간다. 지금 현재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마음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저절로 글로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글은 자신을 포함해서 누군가를 속일 수 없다. 글은 바로 자신의 표현이며,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저자가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금방 파악한다. 독자는 저자보다 더 저자의 의도와 마음을 빨리 그리고 쉽게 알아차린다.
나 같은 아마추어 작가는 무엇보다 솔직하게 글을 써야 한다. 누군가를 의식하며 글을 쓸 필요도 없고, 더군다나 독자의 수를 늘리기 위해 일부러 독자의 마음에 드는 글을 쓸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다. 독자로부터 자유로운 아마추어 작가는 그런 면에서 매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된다. 글을 7년 이상 쓰다 보니 신기하게도 글감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글감이 핸드폰 메모장을 가득 메울 때도 있다. 신문에서 글감을 찾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글감을 발견하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거나 주변 상황을 보다 문득 글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나 자신의 일상을 글로 쓰기도 한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주 걷는다. 홀로 걷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과 어울려 걷기도 한다. 길을 걸으며 자연 속에서 글감을 발견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언행에서 글감을 찾기도 한다. 그러니 주변의 모든 것이 글감이 되고, 따라서 글감이 떨어질 날이 없다. 때로는 메모장에 가득한 글감의 목록을 모두 소화하지 못해 부담을 느껴 목록을 지워버릴 때도 있다. 무언가를 들고 있거나 안고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다.
어제 ‘퍼펙트 데이즈’라는 글을 쓴 후에 개운함을 느껴서 몸도 마음도 무척 개운하다. 이 영화를 한 달 전에 본 이후 계속해서 소감을 글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영화는 글의 소재로 마음속에서 저절로 숙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숙성이 된 소재는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낼 때가 온다. 마침 최근에 갖고 있던 고민거리 하나와 영화가 교차되는 순간이 왔다. 하지만 어떻게 글로 표현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거리 역시 마음속에서 숙성되고 있었다. 영화와 고민거리 두 가지가 숙성되며 드러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무더운 날 집에 머물다 보니 저녁 시간이 되어 머리가 무겁고 약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두통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이상하다. 그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숙성된 두 가지가 표현이 되지 않아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글로 표현이 되어야만 두통이 개운하게 가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 식사 후 집 주변 개천가를 매우 천천히 걸으며 감각에 집중하기도 하고 글 생각이 떠오르면 어떻게 글로 정리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구상을 하기도 했다. 한 시간 반 정도 걷기를 마치고 나니 마음속에서 글이 저절로 정리가 되었다.
집에 돌아와 씻은 후 바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글을 완성한 후에는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고, 덕분에 꿀잠을 잘 수 있었다. 마음과 생각이 글을 쓰게 만든다. 표현하며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글은 나에게 글을 쓰라고 두통을 주기도 한다. 표현되어야 할 글이 표현되지 못한 답답함을 신체증상으로 호소하고 있다. 하나의 글을 쓰는데 때로는 매우 편안하게 쓸 때도 있고, 때로는 매우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고통스러울 때는 쓰지 않으면 되고, 그 글감을 포기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이 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글은 이미 나의 분신이 된 느낌이다. 어제 쓴 글 ‘퍼펙트 데이즈’는 쓰는 과정이 매우 힘들었다. 바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마음속에 남아있으며 늘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걷기라는 중재자가 나타났다. 숙성의 시간과 걷기가 이 글을 완성하게 만들었다. 내게는 의미 있는 완성이다. 독자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나 자신의 갈등을 글로 정리할 수 있으니 무척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의 갈등은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없으니 독자에게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아마추어 작가의 자유로움과 편안함과 당당함이다.
걷기와 글쓰기는 매우 친한 단짝이다. 이 둘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길을 걸으며 다양한 길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자신과 대면하기도 한다. 때로는 ‘걷기 멍’을 할 수도 있다. 이런 글감을 길에서 만날 수 있고, 동시에 걸으며 글감을 정리할 수 있다. 니체는 하루 종일 걸은 후에 몇 시간에 걸쳐 한 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걸으며 길 위에서 한 권의 책을 구상하고, 내용을 정리하고 수정한 후, 집으로 돌아와 그것을 바로 글로 써 내려갔다. 철학자 루소 역시 대단한 걷기광이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으며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위해 구상했다고 한다.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그 정리된 생각이 글로 표현된다. 때로는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경우, 집에 돌아와 글로 쓰면서 정리가 되기도 한다. 걷기와 글쓰기는 각각 나름대로의 힘이 있다. 걷기는 신체의 건강과 마음의 견강을 만들고 유지하는 힘이 있다. 생각은 삶이 방향을 잃을 때 방향을 잡아주는 힘이 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글이 나를 이끌어간다.
기와 글쓰기는 나의 평생 동반자이자 가족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미 나의 분신이 되었다. 걷기를 통해 심신의 건강을 살핀다. 걷기는 나의 주치의다. 걷기를 통해 사람과 소통한다. 걷기는 나의 사회활동이다. 걸으며 만나는 사람과 상황을 통해 가르침을 받는다. 걷기는 나의 스승이다. 힘들거나 슬플 때 걸으며 위로받는다. 걷기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다. 글쓰기는 나의 마음 밭을 정갈하게 가꾸어 준다. 글을 쓰며 거친 마음을 다듬는다. 나의 정원사가 된다. 글쓰기를 통해 어지러운 생각과 감정을 정돈한다. 나의 상담심리사다. 글을 쓰며 나 자신의 진위를 가려낸다. 나의 판사가 된다. 글쓰기는 나를 이끌어 간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만들어준다. 글쓰기는 나의 스승이다. 이 두 가지 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나는 내 삶의 의미를 확인하게 되고 때로는 잃어버린 방향을 다시 찾으며 살아가게 된다.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길을 안내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사람들이 좋아하고 고마워한다. 나 역시 그들을 좋아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그들 덕분에 귀찮고 게으른 마음을 물리치고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을 보고 걷기 모임에 참석하거나, 글을 잘 보고 있다는 고마운 댓글을 본다. 나 역시 독자들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갖게 되고, 더욱 책임감 있고 진솔하게 글을 쓰게 된다. 독자들 때문에 글을 쓰지는 않지만, 그분들 덕분에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걷기와 글씨 기를 통해 나와 사람들이 서로 감사함을 느낄 수 있으니 이 또한 무척 좋은 일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걷고 글쓰기를 하며 하루하루 의미를 찾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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