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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몸이 왕이 되는 시간이 왔다

by 걷고 2024. 4. 29.

해파랑길 다녀온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느낌이 든다. 그만큼 이번 여정의 느낌이 좋았던 거 같다. 함께 참석했던 다른 길동무들도 다시 걷고 싶다는 표현을 하며 걷기 중독과 걷고 싶은 충동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2회 차 해파랑길 공지에 참석 댓글을 쓰며 다음 길을 기대하고 있다. 2박 3일간 매일 걷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쉽지 않았기에 더욱 기억에 강하게 남고, 몸은 걷기에 최적화되며 더 걷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다. 일종의 금단현상이 아닐까? 어제는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쉬며 다음 걷기 준비를 하고 있다. 기사님과 통화도 하고, 공지도 올리고, 세부 상황도 확인하는 등 여전히 해파랑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걷기 중독에 빠져있다.      

 

점심 식사 후 도서관에 가서 읽기 쉬운 중국 장편 소설을 빌려왔다. 가벼운 소설을 읽고 싶다. 길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을 좋아하고, 소설도 장편소설을 좋아한다. 어디를 가야 할지 또 무엇을 읽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몸에도 이상 징후가 발견되고 있다. 발이 조금 붓고, 눈도 조금 부었다. 예전에는 없었던 상황이다. 이런 신체적 징후는 쉬라는 경고등이다. 치통도 다시 발발했다가 오늘 아침에는 조금 줄어들었다. 신경을 죽이면 치통은 사라질 수 있겠지만, 신경을 조금이라도 살리면 사소한 치통은 안고 살아야 한다. 의사와 상의 후 결정하면 된다. 나이 들어가며 신체적 노화는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예전의 몸 상태를 기대하는 것도 욕심이다. 조금 불편함을 안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세월 속에 모든 것은 무상하다. 생주이멸이다. 태어나고 머물고 변해서 사라진다. 몸도 서서히 변하고 있고, 앞으로 노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이를 피하거나 거부하면 할수록 자신만 괴로울 뿐이다. 신체의 작은 불편함은 큰 병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방편이 된다. 다만 몸에 마음 챙김을 하며 몸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질병과 불편함과 약간의 통증을 친구 삼아 함께 살아갈 때가 온 것이다.      

 

이틀 정도 지나고 나니 굳이 예정했던 길을 모두 꼭 그렇게 완보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길을 걷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개운하지 않다. 해파랑 길을 일단 시작했으면 끝까지 완보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성취감, 자기 효능감,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자신감, 걷는 재미, 시도한 한 가지를 끝냈다는 보람 등을 느낄 수 있다. 끝까지 완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물론 우리는 완보할 것이다. 하지만 완보하는 과정 역시 매우 중요하다. 종착점을 향해 무조건 달리듯 걷는가 아니면 기간이 더 걸리더라도 여유롭게 걸을까라는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2박 3일 걷고 왔을 뿐인데 몸은 예전과는 다르게 반응하고 있다. 7년 전 산티아고 걸을 때와는 많이 다르다. 이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노화된 신체를 잘 다독거려서 완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간에 두 번 정도 커피숍에 들어가서 차를 마시며 쉬는 시간을 가졌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는 편안함, 여유로움, 피로의 회복, 즐거운 대화는 휴식 후 걷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산티아고 걸을 때 가장 아쉽고 안타까웠던 점이 사람들과 대화도 거의 하지 않고 그냥 앞만 보고 목적지를 향해 곁눈 팔지 않고 질주하듯 걸은 것이다. 쉬고 싶은 곳에서 조금 여유로운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다른 순례자들과도 즐거운 추억을 만들지 못했다. 이번 해파랑 길을 걸으면서 예전의 습관이 즉 조급증이 다시 튀어나왔다. 한번 내려가기 쉬운 길도 아니고 비용도 많이 들기에 이왕 간 김에 많이 걷고 가능하면 빨리 완보하고 싶다는 조급증이 드러난 것이다.      

 

앞으로는 조금 여유롭게 걷고 싶다. 비록 기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길과 경치를 둘러보고 전망이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편안한 휴식도 취하고, 맥주나 커피도 한잔 마시고, 음악도 듣고, 즐거운 대화도 나누며 걷고 싶다. 몸의 요구에 귀 기울이며 길과 함께 나의 몸과도 친해지고 싶다. 지난 세월 동안 마음과 의지가 몸의 주인이었다면, 이제는 몸이 마음과 의지의 주인이 될 때가 온 것 같다. 몸이 있어야 또 건강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이제는 몸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때다. 몸이 망가지면 모든 것이 망가진다. 나의 모든 세계가 무너진다. 몸을 귀하게 모셔야 한다.      

 

어제 해파랑길 2회 차 진행 준비를 하며 지도와 블로그, 걷기 어플 등을 활용해서 전체 일정과 걷는 시간과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어느 지점까지 걸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코스만 마치기에는 너무 아깝다. 무엇이 그렇게 아까운지 잘 모르겠다. 조급증이 만든 욕심 탓일 것이다. 오늘 아침에 이 글을 쓰며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5코스는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6코스 일부를 더 걸을지 말지는 5코스 끝나는 시점에서 참석자들의 상태, 전반적인 일정을 고려해서 판단할 생각이다. 욕심내지 말고 즐기며 걷자. 빨리 끝내려 하지 말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게끔 걷자. 기간이 조금 더 걸려도 괜찮다. 걷기를 통한 건강한 심신의 행복과 유지관리가 걷기 학교의 갈 길이다. 빨리 걷거나 무조건 많이 걷는 것은 우리의 길과는 다르다. 꾸준히 걷다 보면 체력이 좋아지거나 걷기에 몸이 최적화되며 서서히 보속도 늘어나고 조금 더 걸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수 있다. 그러면 그때 상황에 맞춰 걷는 거리를 맞추면 된다. 몸이 주인이 되어 몸이 원하는 대로 즐기며 걷자. 평생 종으로 살아왔던 몸을 왕으로 모실 시간이 온 것이다. 몸을 정성껏 모시며 즐겁게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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