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네 집에 머물며 손주들 돌보기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지나간다.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함께 지낸다. 요즘은 월요일에 출근해서 목요일 밤에 집으로 돌아오고, 아내는 금요일 아침에 돌아온다. 두 집 살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덕분에 손자들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서 기쁘다. 아내나 나나 체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조금만 몸을 더 움직여도 피곤이 몰려오거나 면역력이 약해져 감기에 걸리기도 한다. 무거운 짐을 들거나 손자들 안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다. 노화를 실감하며 체력을 아껴서 함께 지내고 있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두 손주들이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우리 방으로 들어와 잘 자라는 인사를 할 때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엄마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고 있다. 뒤뚱거리며 들어와 배꼽 인사를 한 후 미련 없이 돌아서 나간다. 아이들을 안으며 “오늘도 잘 놀았니?”라는 질문 겸 인사를 건넨다.
그 이후부터 우리 부부에게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아내는 태블릿을 보고 나는 TV를 본다. 가끔 우리 부부와 딸네 부부 네 명이 식탁에 앉아 와인을 한잔 하기도 한다. 이제는 이런 일정에 제법 익숙해졌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다. 아내는 일찍 적응하며 자신의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잘 해내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편이다.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쓴다. 그리고 올림픽 공원을 걷는다. 2시간 정도 걸은 후 낮잠을 30분 정도 자고 나서 책을 보거나 TV를 본다. 최근에 딸네 집에서 명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럴만한 여건이 안된다. 갑자기 근처 불광사와 석촌호수가 떠올라 어제 두 곳을 가보았다. 명상과 마음챙김 걷기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오랜만에 사찰 참배를 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오랜 기간 사찰을 가지 않았다. 불광사 법당에 들어가 상단, 중단, 하단을 향해 각각 삼배를 올렸다. 사찰의 분위기는 언제 어디를 가든 고향에 온 느낌이 든다. 법당에 좌복을 깔고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한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조금 후에 보살님들이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노인정이 되어간다. 그분들은 아직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고, 만나서 얘기를 나눌 친구들이 있고, 분위기가 차분한 법당에 모인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분들이다. 소란한 분위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법당을 나와 종무소를 향했다.
우리 부모님 49재를 지내고 영가를 모신 사찰이 바로 불광사다. 종무소에서 확인을 해보니 우리 부모님 외에 조부모님도 함께 모셨고, 처음 듣는 영가들도 있다. 아마 외가 쪽 친척인 듯하다. 우리 조상님들의 영가가 모셔진 불광사야말로 내게는 선산이다. 이제는 선산을 찾을 일도 없다. 여전히 선산은 있지만, 우리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은 모두 여기에 모셔져 있다. 불광사는 우리와 인연이 깊은 절이다. 어머님께서 오랜 기간 다니셨던 사찰이고, 사촌 매형이 법사로 법문을 펼치신 곳이기도 하다. 불광사 바로 옆에 교육원이 있고, 그 안에 선원이 있다. 선원에 들어가 보았다. 건물 4층에 있는데 역시 선원 분위기는 사찰 내 다른 법당과는 사뭇 다르다. 선원 문 앞에 ‘정진 중이니 문 열지 마십시오’라는 문구가 붙여져 있다. 선원 출입 시간 외의 출입을 삼가라는 문구다. 그리고 그 옆에 출입 외 시간에는 옆의 강의실에 들어가 정진하라는 안내문이 쓰여있다. 왠지 그 문구를 보니 잘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강의실에 들어가 잠시 앉아본다.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진다. 선원 특유의 청정함과 고요함, 경건함이 느껴진다.
사찰을 나온 후에 석촌호수 주변길을 걷는다. 교육원 건물 바로 앞에 건널목이 있고, 그 건널목을 건너면 바로 호수가 나온다. 전체를 한 바퀴 천천히 걷는다. 약 3km 정도 되는 거리고 40분 정도 걸린다. 생각보다 짧고 시간도 적게 걸린다. 많은 사람들이 호수길을 걷고 있다.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여름에도 햇빛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나무 그늘이 좋은 길이다. 이 길을 뛰는 사람들과는 걸으며 한 번 더 마주치게 된다. 호수길을 걷고 돌아오는 길에 뒷골목을 걸으며 예전 분위기를 느껴본다. 큰길 앞에는 현대 도시가 있고, 뒷골목에는 약 20년 전 도시가 있다. 예전 느낌의 중국집에 들어가 볶음밥을 시켜 먹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제법 많다. 종업원들의 서비스도 좋은 편이다. 손님을 웃고 맞이하고, 카운터의 직원은 전화 주문을 받는데 매우 정성스럽게 받는다. 거리만 예전 거리가 아니고, 식당 주인과 종업원도 예전 사람들이다. 아직 정이 남아 있어서 보기 좋다.
딸네 집에서 1분 정도의 거리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 2년 만에 처음 들어가 본다. 일층에는 어린이 도서가 진열되어 있고, 2층에는 청소년과 성인 도서가 진열되어 있다. 열람실이 마치 사설 도서관처럼 조용하고 편안하다. 혼자 책 읽고 글 쓰고 조용히 앉아 있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집 주변에 이런 곳이 있었는데, 찾아오는데 2년 정도가 걸렸다. 좀 더 일찍 찾지 못한 것이 아쉽다. 둘째 손자가 여러 클리닉에 다니는데 기사 노릇을 하고 있다. 오전에는 시간이 있지만, 오후 시간을 들쭉날쭉해서 뭔가를 하는 데는 시간이 애매모호하다. 그런 시간에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아침 8시 30분경 집에서 출발해서 불광사와 석촌 호수 주변길을 걷고, 점심 식사를 하고 도서관에 들려 집으로 돌아오니 12시 30분 정도 된다. 약 네 시간 정도 걸렸고, 약 10km 정도 걸었다. 혼자 반나절 보내기에 좋은 일정이다. 불광사에 문의를 했더니 회비를 내면 언제든 선원에 들어가 수행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상주하시는 스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정형화된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원 참가자들 모임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마음에 든다. 시간 될 때 언제든 들려 수행하면 된다. 자유롭고 편안한 시민선방이다. 늘 열려있는 곳이지만 찾아가는 사람에게만 열려있는 선원이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일정을 찾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이 일정을 소화하기에 시간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늘 하듯 올림픽공원을 걷거나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읽으면 된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정이 있어서 다행스럽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이런 일정을 만드는 것이 내게는 시간이 걸리고 중요한 일이다. 그래도 일단 시작하면 꾸준히 하는 편이다. 덕분에 조상님들과 잠시 함께 머물렀다. 앞으로는 점점 더 자주 뵐 수 있을 것 같다. 불광사와의 귀한 인연에 감사드린다. 또한 가까운 곳에 수행처가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딸네 머무는 것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때 후회하는 일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감사하며 매 순간 잘 살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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