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좌복에 앉는다. 최근 들어 가끔 좌복에 앉아 50분 정도 호흡 명상을 한다. 열심히 걷고 사람들과 만나서 떠들며 지내다보니 마음이 많이 들뜬 거 같다. 꾸준히 걷고 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고 있다. 이제 걷기에 대한 갈증도 많이 줄어들었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없어도 그다지 허전하지도 않다. 홀로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다. 좋은 취미가 하나 더 생겼다. 음악 듣는 취미다.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듣고 있다. 아직 사람 목소리로 내는 음악은 크게 끌리지 않는다. 지금도 집안에는 모차르트 음악이 흐르고 있고,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몸도 건강해지며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이키는 연습을 하며 하루하루 편안하게 보내고 있다.
좌복에 앉아 호흡에 집중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고 마음과 생각은 분주히 돌아다닌다. 그럼에도 좌복에 앉아있는 동안에는 최소한 두 가지 업을 짓지 않게 된다. 몸은 가만히 있으니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은 저절로 멈추게 된다. 입을 다물고 호흡에 집중하고 있으니 구업(口業)도 만들지 않는다. 마음과 생각은 죽 끓듯 난리를 치고 있으니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은 계속해서 짓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호흡이 닻이 되어 떠오른 생각을 흘려보내니 아뢰야식이라는 주머니 크기는 조금은 줄어들거나 아니면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호흡에 집중하든, 아니면 망상과 잡념 속에서 헤매든 좌복에 앉아있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최소한 두 가지 업은 짓지 않을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서 망상과 잡념도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가라앉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꾸준히 앉는 습관을 들이려한다.
음악을 듣기 시작하며 생긴 습관 중 하나가 신문을 보며 음악 관련 기사를 읽는 일이다. 어제 신문에는 임윤찬, 조성진, 손열음, 세 명의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매일 듣는 연주자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임윤찬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가 있고, 조성진의 플레이리스트 중에는 프랑스의 대표적 피아니스트인 알프레드 코르토가 있다. 특히 관심을 끌었던 기사는 손열음의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영국 출신 여성 피아니스트 마이러 헤스에 관한 얘기다.
“그녀의 이름을 음악사에 새긴 사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공습의 위험에도 영국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의 국립 미술관에서 매일 점심 시간에 시민들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한 일이었습니다.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이 음악회는 전쟁 후까지 이어져 6년 동안 무려 1698회의 연주가 이뤄졌어요. 그녀의 동료들은 바쁜 일정 가운데 그녀가 주변의 이웃들과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음악인으로 보여준 행동 등을 오랫동안 기억했죠.” (조선일보, 2024년 2월 19일)
이 기사를 읽으며 꽤 오랜 전에 봤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 <피아니스트>가 떠오른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블라덱 슈필만이라는 피아니스트는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도중 도망쳐 나온다. 가족과 생이별을 한 후 썩은 감자로 연명하는 피아니스트. 숨어 있는 그를 발견한 독일 장교는 그가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을 알고는 폐허 안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고 한다. 그의 연주에 감동을 받은 독일 장교는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전쟁 후 슈필만은 수용소로 끌려간 독일 장교를 찾아 나서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다. 슈필만은 나중에 독일 장교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영화를 본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폐허가 된 2층 건물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와 손에는 먹을 것을 쥐고 그의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독일 장교가 서 있는 장면이 기억난다. 신문 기사를 읽으며 영화 <피아니스트>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봤지만 음악은 들리지도 않았고 기억도 나지 않지만 장면은 꽤 선명하게 기억난다. 이번에 다시 보게 되면 음악에 집중하며 영화를 보고 싶다.
살아남기 위해서 또 먹고 살기 위해서 죽어라 음악을 연주한 슈필만과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연주를 하는 마이러 헤스. 이 두 사람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평생 음악을 연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음악은 생존의 수단이기도 했고, 삶의 수단이며, 함께 살아가는 방편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음악은 자신 자체였을 수도 있다. 이들과 음악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 즉 하나일 것이다. 어느 철학자는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이 피아니스트들은 지구 멸망의 순간에 피아노를 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나는? 질문은 다시 내게 돌아온다. 외부의 자극을 통해 자신의 내부를 살펴본다.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하고 싶을까? 굳이 지구 멸망까지 가지 않더라도 죽기 전까지 또는 죽는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피아니스트들은 피아노 연주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있다. 청소부들은 청소를 하며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의사는 의술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있고, 요리사는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각자 맡은 역할을 묵묵히 해내며 세상을 건강하게 돌아가게 만들며 동시에 자신의 삶을 가꾸어간다. 나는 무엇으로? 어떤 일로 나의 역할을 해 나갈 수 있을까? 질문은 ‘나는 왜 태어났는가?’로 돌아간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걷고 명상하고 글을 쓰고 있다. 아직 내가 무엇인지 찾지는 못했지만, 할 일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걷기와 명상, 상담을 통해 심신이 힘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내가 할 일이다. ‘걷고의 걷기학교’를 시작한 일도 이 때문이다. 굳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몸이 지치고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걷기학교에 참석해서 걸으며 또 길동무들과 얘기를 나누며 건강한 삶을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인연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길 기원한다. 나 역시 길동무들과 함께 걸으며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나를 돕고 동시에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고 싶다.
어제 친구 병문안을 다녀왔다. 힘든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수용하며 강한 의지로 암을 극복하고 있는 친구다. 지금은 요양병원에서 치료 받으며 회복하고 있지만, 조만간에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해서 자연 속에서 치료와 회복을 하고 싶다고 한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회복을 위한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암 극복 의지를 확인 할 수 있어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한 친구가 투병하는 친구의 회복을 기원하며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만든 수제 백을 선물로 준비해서 전해주었다. 흐뭇하고 고맙다. 이 역시 자리이타다. 선물하는 마음 밭에는 꽃이 필 것이니 자리(自利)가 되고, 암 투병하는 친구에게는 위로가 될 터이니 이타(利他)가 된다. 일상 속에서 자리이타를 실천할 수 있는 많은 일이 있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자리이타의 행동이다.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친구의 건강 회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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