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변할까? 어느 정도는 변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천성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사회활동을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또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가면을 쓰고 있다고 가면의 모습이 그 사람의 참모습이 될 수는 없다. 자아 성찰을 통해 조금은 더 성숙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해갈 수도 있지만 이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변하는 데는 10년이 걸려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는 단 일 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만큼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신적 습관 때문인 것 같다. 타고난 천성에 가정적, 사회적 관계가 얽혀 하나의 패턴을 만들어 낸다. 이 패턴이 정신적 습관이고, 이 습관이 반복되어 강화되며 자신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체성은 자신을 지키는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성을 쌓아 외부와 고립된 채 살아가는 불편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언젠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술 필요가 있다. 이 정체성이 가면이다. 가면을 쓴 기간이 늘어나고 가면에 매달리게 되면서 점점 자신의 참모습은 사라지고 가면이 자신이라는 착각까지 하며 살다가 가면이 자신이 되어간다. 자신을 위해 만든 가면이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 참 아이러니다. 중년 이후 삶의 과제 중 한 가지는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모습에서 벗어나 참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어제 암 투병하고 있는 친구 병문안을 다녀왔다. 누군가의 병문안을 이처럼 자주 찾아간 적은 처음이다. 물론 가까운 지인 중에 암 투병을 하는 친구가 처음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람을 대하는 나의 모습이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너무 가까운 것도 싫고, 너무 먼 것도 싫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는 것이 편안한 사람이다. 게다가 사람을 만나는 기준이 나의 필요에 의해 만나는 경우가 많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친구의 요청에 부응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때도 내가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만나러 나가지 순전히 친구의 요청 때문에 또는 친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나가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친구를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를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 만남에 있어서 무척 이기적인 사람이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모든 결정의 최우선은 나 자신이다. 나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어제 병문안 가서 친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한 친구가 내게 변한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그 모임에서 늘 한 발은 빼고 지내온 나의 모습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 말인 것 같다. 그렇다. 어떤 모임에서도 푹 빠지는 경우가 없다. 늘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며 지낸다. 그 친구는 제법 자주 병문안을 오는 나의 모습을 보며 변화를 눈치챈 것 같다.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모습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최근에 들어서 알게 된 것 같다. 사람들을 만나는 데 편안하거나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편이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내가 방문한 횟수는 적은 편이지만, 이조차도 내게는 무척 잦은 횟수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이 모임의 사람들은 무척 인간적인 사람들이다. 서로를 많이 아껴주고 걱정하며 남의 일을 마치 내 일처럼 걱정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모습과 행동을 보며 익숙하지 않은 어색함도 있었고, 그들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알고 지내며 그들의 모습이 한결같다는 믿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모임 내에서 순간적인 갈등과 불편함은 가끔 있어왔지만 이는 모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양념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모임이 또 하나 있다. 대학시절부터 만났던 영어회화 서클의 선후배 네 명이 만나고 있다. 45년 이상 이어온 인연이다. 이 모임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고 ‘너와 나’의 벽이 허물어진 모습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 모임에서도 거리를 두며 지내다 최근에야 마음을 열고 푹 빠지려 노력하고 있다.
가만히 자신을 돌아본다. 왜 나는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또는 모임에 푹 빠지지 못하고 거리를 두며 지내고 있는가?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진실한 관계를 맺은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내게 불편한 존재들이었다. 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해야만 했고, 정작 도움이 간절히 필요할 때조차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도움 자체를 아예 기대하고 있지 않았고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은 늘 쓸쓸하고 외롭고 힘들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은 없었고 홀로 서야 된다는 생각만을 하며 지내왔다. 누군가가 너무 가깝게 다가오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오히려 의심이 들어 피하기도 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삶을 위해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왔다. 하지만 이 두 모임과 최근에 만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내면 성찰을 통해서 조금씩 마음이 열리며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고 있다. 이런 변화를 한 친구가 눈치챈 것이다.
둘째 손자가 발달지연으로 이런저런 클리닉에 다니고 있다. 우리 부부는 월요일에 딸네 가서 금요일 아침에 우리 집에 돌아온다. 나는 가끔 외부 일이 있을 경우에는 홀로 우리 집에 머물며 지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내와 함께 딸네서 지낸다. 처음에는 딸네 머무는 것이 불편했다. 사위와 데면데면한 관계도 불편했고, 잠자리도 불편했고, 두 손주들을 돌보며 행복과 불편함을 함께 느끼기도 했다. 특히 나의 일상과 루틴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컸다. 융통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루틴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편안한 사람이다. 두 집 살림으로 일상에 혼란이 오는 것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 백수가 루틴을 지켜야 된다는 강박으로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올 6월이 되면 만 2년이 된다. 꽤 오랜 기간이다. 아내는 딸네서 지내며 불평 한 마디 없이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고 있다. 힘들 만도 한데 티를 내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아내는 주어진 환경을 잘 받아들이며 자신을 환경에 맞추며 살아가는 지혜를 지닌 사람이다. 아내가 상황을 수용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존경하는 마음이 든다. 반면 나는 두 집 살림하는 것에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요즘은 제법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다. 이 기간은 내게 무척 중요한 기간이다. 손주들과 함께 지내며 아이들의 성장 과정은 추억이 되고, 아이들이 내게 먼저 장난을 걸어오고 안기는 모습이 눈물겹게 사랑스럽다. 딸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을 가까이 지켜보며 잘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사위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많이 변해서 이제는 사위라는 생각보다는 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살갑게 대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의 불편한 벽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함께 지내며 만들어진 가족애를 진하게 느끼고 있다. 불편함을 어느 정도 감수하며 얻은 값진 선물이다. 가족과 함께 지내며 또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리며 마음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가고 있다. 좋은 일이다.
무언가에 푹 빠지지 못하는 것이 비단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지내는 것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어떤 일에도 푹 빠져 지내지 못한다. 걷기도 둘레길 정도 걷는 것을 선호하는 정도다. 글을 쓰고 있지만, 아마추어 작가로 그냥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상담심리사이기는 하지만 상담에 푹 빠져 전문가가 되려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느 분야에서도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주변만 서성이며 지내고 있다. 최근에 소설 ‘숨’(송기원 저)을 읽었다. 자전적 소설로 명상의 체험 과정을 풀어낸 책이다. 저자의 명상의 깊이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한다. 이 소설은 저자가 미얀마 파욱센터에서 수행하며 체험한 명상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오랜 전에 파욱 스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2박 3일 사마따 위빠사나 집중 코스를 진행하실 때 참석한 경험이 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냥 앉아만 있었고, 아무 소득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금씩 명상 입문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저자의 경험과 비교해 보면 나는 아직 명상에 입문조차 하지 못한 사람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어떤 일과의 관계에서도 진실되고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주변만 빙빙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온 방법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며 그 균열의 틈을 통해서 빛이 들어오고 있다. 시간이 흘러가며 점점 더 그 틈은 커지고 빛의 양과 밝기도 커지고 밝아질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걷기와 글쓰기도 굳이 전문가가 되지 않아도 또 유명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자체로 충분하다. 꾸준히 오랜 기간 함께 할 수 있는 삶의 동반자로 충분하다. 하지만 명상의 경우는 다르다. 소설 ‘숨’을 읽으며 더 늦기 전에 수행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다. 저자는 딸을 먼저 보내고 자신의 태생으로 인한 자기 모멸감에 벗어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수행에 매달렸다. 간절함과 처절함, 그리고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으로 수행에 매달리며 결국 자신과 딸과의 참 만남을 한다. 명상할 시간은 줄어들고, 명상을 할 수 있는 에너지도 점점 더 고갈되어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수행해야 한다. 이제는 사람들과의 관계, 또 나의 삶이 더 이상 희미해지거나 외부 지향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외부로 쏟았던 또는 향했던 마음을 내부로 향해서 쏘아야 한다. 마음의 평온은 바깥세상으로 달리던 마음을 내부로 돌려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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