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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의 걷기일기

핸드폰과 거리 두기

by 걷고 2023. 11. 30.

 삼 일 전 남파랑길을 걷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꺼지며 먹통이 된다. 일요일 오전이다. 그리고 어젯밤인 화요일 저녁까지 삼 일간 핸드폰 없이 지냈다. 첫날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길동무가 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선 전화를 빌려서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아내다. 나를 가장 걱정해 줄 사람이고, 내가 가장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를 걱정해 줄 사람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고 고맙다. 그리고 연락할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안심이 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연락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매우 우울하고 불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전화가 먹통이 되니 갑자기 장님이 된 느낌이 들었다. 만약 혼자 걸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우선 길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걷기 마친 지점에서 집에 가는 방법도 막막했다. 기차표 예약한 것이 핸드폰에 들어있고, 걷기 종착점에서 역까지 가는 방법을 찾는데 애 먹었을 것이다. 금융 거래도 핸드폰이 있어야 가능하다. 일요일에 걸었던 종착점에는 버스가 하루에 몇 대 다니지 않는 교통 편의성이 좋지 않은 곳이다. 갑자기 모든 생활이 멈춘 느낌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전원을 다시 켜려고 시도했지만 허사다. 

 

현실적인 문제부터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다. 모 단체 면접관 일정이 월요일과 화요일에 잡혀있다. 월요일 일정은 확정되어 있어서 그냥 가면 되는데, 화요일 일정은 추후 연락해 주기로 했는데 연락받을 방법이 없다. 전화번호는 단 두 개만 기억하고 있다. 아내와 딸아이 전화번호. 월요일 면접장에 가서 다른 위원을 통해 담당자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른다. 걸으며 핸드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떠오른다. 걷기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같이 걷는 길동무에게 불편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걷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된다. 핸드폰 중독이 된 것 같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상보다 일찍 끝나서 교통편을 바꿔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했다. 이 역시 길동무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마산에서 서울까지 4시간 정도 예상했는데 6시간 정도 걸렸다. 버스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잠을 자도 금방 깨고, 차는 막히고, 할 일은 없다.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검색이나 전자책을 읽을 수도 있는데, 열리지 않는 핸드폰은 짐만 될 뿐이다. 아무 할 일도 없이 좁은 버스 안에서 6시간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조용히 호흡에 집중하며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아내가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아 휴게소에서 친구 전화를 빌려 다시 전화로 상황을 보고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노트북에 카톡이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오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카톡을 열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당분간 연락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해 부탁한다고 연락하고, 동료 면접관에게도 상황을 알려주었다. 

 

월요일 아침에 면접장에 도착해서 모 단체의 면접 담당자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상황을 면접 진행 요원에게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다행스럽게 담당자와 연락이 닿아서 카톡을 통해 면접 일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일단 업무 관련된 현실적인 문제는 해결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집 근처 A/S센터에 핸드폰을 맡기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병원에서 진료 대기표를 받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담당자 말에 의하면 메모리 기기판에 이상이 생겨서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다고 한다. 그냥 깡통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딸에게 연락해서 기본 사양의 핸드폰 구매를 부탁했다.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핸드폰 없이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갑갑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며 살만했다. 그간 너무 쓸데없이 핸드폰을 들고 살았다는 생각도 든다. 굳이 핸드폰 사양이 좋을 필요가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앞으로 핸드폰과 거리를 두고 기본적인 연락 주고받는 일 외에는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보급형으로 구매 후 기본적인 어플을 깔았다. 전화번호도 다운로드할 수가 없어서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카톡으로 연락처를 받았다. 그간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 중 일 년에 전화통화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90% 이상 될 것이다. 웬만한 연락은 카톡으로 주고받으면 된다. 사진기, 갤러리, 일정표, 노트, 카톡, 전화, 메시지, 포털사이트 하나, 유튜브, SNS 세 가지, 주거래 은행 어플, 걷기 어플이 지금 내 핸드폰에 깔린 모든 어플이다. 핸드폰 화면에 공백이 많이 생기면서 환해졌다. 

 

삼 일간 핸드폰 없이 지내다 보니 금방 적응이 된 느낌이다. 핸드폰 없으면 불편해서 지내기 힘들 거 같았는데 오히려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편리한 기능을 갖고 있는 핸드폰을 잘 이용하는 것은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과다한 사용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고속버스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 쓸데없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 역시 핸드폰 사용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번 일을 당하고 보니 꽤 의존을 많이 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핸드폰과 거리 두기를 하려고 한다. 꼭 필요한 기능 외에는 사용을 자제하며 그 시간에 조용히 자신을 살피고 싶다. 두세 시간 이상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핸드폰 없이 지내보니 그 한가로움이 좋았다. 책을 읽으면 꽤 많은 독서량이 될 수 있다. 어젯밤에 핸드폰의 기본 세팅을 마치고 사람들과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연락처를 입력한 사람 수가 매우 제한적이다. 굳이 사람 수를 늘릴 필요도 없다. 지금 자주 연락하는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잘 유지하면 된다. 앞으로 전화 오는 사람 전화번호만 입력할 생각이다. 필요하면 카톡으로 얼마든지 연락할 수 있다. 요즘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채 스무 명도 안 되는 것 같다. 또 굳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려 애쓸 필요도 없다. 

 

딸아이 결혼시키며, 부모님 장례를 치르며 지인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리된 경험이 있다. 이번 핸드폰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번 사람들과의 관계가 정리된 느낌이다. 일부러 관계를 끊은 것이 아니다. 연락이 닿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소중히 이어가고,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끊어진다. 이어짐과 끊어짐은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세월의 흐름이 만들어준다. 그 흐름에 맡기면 된다. 굳이 억지로 이어가는 인연도 무의미하고, 굳이 억지로 끊어내는 인연도 무의미하다. 핸드폰과의 거리 두기는 기계, 사람, 주변과의 거리 두기다. 이런 거리 두기를 통해서 자신을 살필 기회를 갖게 된다. 자신을 살핀다는 것은 자신과의 거리 두기가 된다. 너무 가까우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거리를 두어야 제대로 보인다. 결국 핸드폰과의 거리 두기는 자신을 객관화하고 자신과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살피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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