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걷기 동호회 활동에 참석해서 걸었다. 익숙한 환경을 만나니 익숙한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반갑고 즐겁다. 불과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느낌이 든다. 반가운 길동무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걷기 마당’이 내게 꽤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끔은 벗어나고 싶은 곳이고 동시에 가끔은 오고 싶은 곳이다. 고향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힘든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 나를 편안하게 받아 준 곳이다. 길이 활력을 되찾아 주었고, 길동무들이 사람의 정을 되찾아 주었다. 맞다. '걷기 마당'은 마음의 고향이다. 고맙다.
후미에서 걷는다. 오늘의 리더인 도니님의 명령이다. 리더 역할을 하기 전까지 늘 자처해서 후미에서 걸었다. 혼자 걷는 것이 편했고, 사람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금은 리더건, 후미건, 중간이건 상관없이 걷는다. 그만큼 편안해진 것이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편안하고, 대화를 나눠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혼자 걸으면 편안하고, 함께 걸으면 즐겁다. 내가 변한 것이다. 다행이고 고맙다. 변화는 살아있다는 증거다. 모임에 안 나온 지 불과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 참석자의 반 정도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반갑다. 새로운 회원의 참석은 이 카페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카페는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다. 유기체가 계속해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회원의 유입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사람이 모여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새로운 분위기는 변화의 결과다.
앞에 산나물님이 걸어가고 있다. 오늘 처음 만난 회원이다. 조금 더운지 패딩을 벗어 허리에 두른 후 양손에는 물병과 휴대전화를 들고 걷는다.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산길을 걷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진다. 물론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휴대전화를 내 배낭 포켓에 넣고 편안하게 걸으라고 얘기했더니 물병까지 맡기려 한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너무 뻔뻔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물병은 들고 다니며 마시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하며 물병 무게를 덜어낸다. 그리고 조금 후 그 행동은 ‘뻔뻔함’이 아니고 ‘배려와 자유로움’이었다는 것을 느끼며 미안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마움과 통쾌함이 올라왔다. 나의 제안을 뿌리치지 않고 기꺼이 받아 준 따뜻한 마음이 고마웠다. 두 개의 물건을 맡기려는 태도가 전혀 불편하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느껴졌다.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언젠가부터 ‘왜 걷는가?’라는 질문을 안고 걷는다. 최근에 찾은 이유는 ‘자유’다. 삶의 모든 구속, 사회적인 관습과 예절, 개인적인 욕심 등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어떤 일을 하든지 남의 눈치를 보거나 사회적 시선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다. 모든 구속은 자신이 만든 족쇄다. ‘참 자아’가 아닌 ‘가짜 자아’가 만든 삶의 족쇄다. ‘참 자아’는 원래 누구와도 비교를 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비난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너와 나’의 벽이 없는 ‘하나’의 세상이다. 반면 ‘가짜 자아’는 자신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이기심이 발동하여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고, 비난하고, 우위에 서려고 스스로를 구속한다. 나는 걸으며 ‘자유’를 되찾고 싶다. 내가 만든 구속을 나 스스로 풀어내어 ‘자유’를 되찾고 싶다. 원래 있었던 ‘자유’였기에 되찾고 싶은 것이다. 이는 ‘참 자기’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신경증의 원인은 경험과 표현의 불일치에 의해 발생한다. 비난받고 있는데 웃고 있는 경우, 화가 나는데 표현하지 못하고 억지로 참는 경우, 사랑받고 싶은데 요구하지 못하고 괜찮은 척하는 경우, 상대방이 잘못했는데 오히려 자신이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경우 등이 바로 경험과 표현의 불일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불일치로 인해 마음속에 병이 발생한다. 사회적인 관습과 예의, 가정적 책임과 역할, 개인적인 욕심 등으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되는 또는 할 필요조차 없는 언행을 하며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괴롭힌다. 스스로 만든 족쇄다. 나 역시 아직도 이런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언젠가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경험과 표현의 일치가 되는 날이 오길 희망하며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가끔 ‘자유로움’의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뻔뻔함’을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겉으로는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이면서 실은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이는 자유로움이 아닌 못되고 뻔뻔한 짓일 뿐이다. 오직 자신의 안락함과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뻔뻔함’과 ‘자유로움’의 차이는 무엇일까? 또 이 둘의 경계는 무엇일까? 어디까지가 뻔뻔함이고 어디까지가 자유로움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오늘 산나물님과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 경계가 바로 ‘배려’와 ‘존중’에 달려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설사 언행이 뻔뻔해 보여도 이는 자유로움의 표현이다.
도움을 주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이는 비폭력적 폭력이 되고, 강요가 되고, 동정이 되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가 된다. 나는 과연 그녀가 원하는 친절을 베풀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불편함을 주지는 않았는지도 살펴볼 필요도 있다. 불필요한 과잉친절은 절대로 친절과 배려가 아니다. 그녀가 잘 받아주었기에 다행이었지, 만약 그녀가 거절했다면 이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행동이다. 베푸는 물건이나 호의가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주고 싶어 하는 것인지가 ‘뻔뻔함과 자유로움’의 차이를 만든다. 나의 관점에서 불편함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인 산나물님의 관점이다. 산나물님도 부디 그렇게 생각하길 바란다. 도움 주는 일도, 받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참 세상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 이런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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